
당초 재계에서는 일진그룹이 허진규 회장의 장남 허정석 일진홀딩스 부회장과 차남 허재명 전 일진머티리얼즈 사장 등 두 사람을 중심으로 계열분리될 것으로 내다봤다. 지분 정리도 어느 정도 끝난 상황이었다. 지난해 말 기준 허정석 부회장은 일진홀딩스 지분 29.12%를, 허재명 전 사장은 일진머티리얼즈 지분 53.30%를 각각 보유하고 있었다.
그런데 허재명 전 사장은 지난 3월 보유 중인 일진머티리얼즈 지분 전량을 롯데그룹에 2조 7000억 원을 받고 매각했다. 허 전 사장은 일진머티리얼즈 사내이사에서도 퇴임했다. 허 전 사장이 일진머티리얼즈를 매각함에 따라 일진그룹의 총 자산 규모도 2조 원대로 줄어들어 공시대상 기업집단에서 제외됐다.
재계에서는 허재명 전 사장의 향후 행보에 대해 다양한 추측이 오갔다. 일각에서는 허 전 사장이 과거 추진했다가 큰 재미를 보지 못한 패션 사업에 재도전할 것이라는 전망도 내놨다. 하지만 일진그룹과 허 전 사장 모두 일진머티리얼즈 매각 사유와 향후 행보에 대해 입장을 밝히지 않았다.
하지만 일요신문 취재 결과 허재명 전 사장은 지난 2월 14일 ‘아이에이치컴퍼니’라는 투자회사를 설립한 것으로 확인됐다. 아이에이치컴퍼니의 사업목적은 △증권 및 유가증권의 투자 및 매매업 △채권의 투자 및 매매업 △부동산의 매매, 개발 및 공급업 △부동산 임대업 △부동산 거래 및 개발에 대한 컨설팅업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및 구조화 금융업 △NPL(부실채권) 자산의 매매 및 자산유동화업 등이다.
아이에이치컴퍼니는 사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지는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일요신문은 지난 4월 26일 서울시 성동구에 위치한 아이에이치컴퍼니 사무실을 방문했지만 관계자를 만나지 못했다. 인근 사무실 관계자는 “(아이에이치컴퍼니는) 한 달 정도 전에 입주했다”면서도 “상주하는 직원은 거의 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허재명 전 사장은 일진머티리얼즈 매각 대금으로 수조 원의 현금을 얻었기에 자본에 대한 걱정은 당분간 없을 것으로 예상된다. 하지만 최근 증권 투자업과 부동산업의 전망이 밝지 않다는 점은 사업 본격화의 걸림돌이 될 전망이다.
이형석 현대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부동산 PF 부실 위험이 상존하는 가운데 국내 금융시장 불안정성이 심화되면 부동산 경기의 회복을 제한하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며 “실물경기의 위축과 금융 불안정성이 심화될 경우 경착륙 시나리오도 배제할 수 없을 것으로 판단한다”고 분석했다. 증시도 조정 우려가 높다. 양해정 DS투자증권 연구원은 “(주식 시장은) 시장 조정으로 인한 우려가 높아졌고, 밸류에이션(가치평가) 수준도 높아져 있어 조정의 빌미도 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일각에서는 허재명 전 사장이 처남인 박철완 전 금호석유화학 상무를 지원할 가능성도 제기한다. 박 전 상무는 2021년 박찬구 금호석유화학 회장과의 경영권 다툼에서 패한 후 야인으로 지내고 있다. 이런 가운데 허 전 사장이 박 전 상무를 지원하면 금호석유화학 경영권에 변수로 작용할 수 있다.
금호석유화학의 시가총액이 약 4조 원 수준임을 감안하면 2조 원의 현금으로 금호석유화학 지분 약 50%를 확보할 수 있다. 박찬구 회장과 특수관계자가 보유한 금호석유화학 지분은 26.05%고, 여기서 박철완 전 상무의 지분(8.87%)을 제외하면 17.18%다. 허재명 전 사장이 마음만 먹으면 금호석유화학 경영권 분쟁의 불씨가 당겨질 수도 있는 셈이다. 그러나 박철완 전 상무 측 관계자는 “공식적인 입장을 밝히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관계 끝? 일진그룹에 발 걸친 허재명 전 사장
허재명 전 일진머티리얼즈 사장은 일진머티리얼즈 지분 전량을 매각했지만 일진그룹과의 관계가 완전히 끊어진 것은 아니다. 일진머티리얼즈는 롯데그룹에 매각되기 직전 일진제강 지분 10.35%를 허 전 사장에게 매각했다. 일진제강의 현재 주주구성은 △허진규 일진그룹 회장 68.18% △허재명 전 사장 17.74% △일진C&S 6.89% △김향식 씨(허진규 회장 아내) 4.45% 등으로 이뤄져 있다.
일진머티리얼즈는 허재명 전 사장에게 일진디스플레이 지분 14.64%도 매각했다. 일진디스플레이 주주는 △허진규 회장 24.63% △허재명 전 사장 14.64% △일진반도체 3.09% 등으로 구성돼 있다. 허진규 회장 의중에 따라 일진제강과 일진디스플레이의 경영권이 허재명 전 사장에게 넘어갈 수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허진규 회장은 허재명 전 사장보다는 장녀 허세경 일진반도체 대표를 밀어주는 분위기다. 허세경 대표는 일진반도체와 일진C&S 최대주주다. 따라서 일진제강과 일진디스플레이의 실질적인 3대주주다. 허 회장은 지난 1월 일진제강 지분 6.89%를 일진C&S에 증여한 바 있다.
현재 지분율을 고려했을 때, 향후 허세경 대표가 일진제강과 일진디스플레이의 경영권을 얻더라도 허재명 전 사장의 존재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일요신문은 이와 관련한 입장을 듣기 위해 일진그룹에 연락을 취했지만 답을 받지 못했다.
박형민 기자 godyo@ilyo.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