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7월 23일 한국기원에서 열린 제6기 지지옥션배 제7국에서 서능욱 9단(왼쪽)과 이민진 7단이 대국하고 있다. |
‘서 대주’는 서 9단의 최근 별명. 지난해 연말 시니어 기전인 제2기 대주(大舟)배에서 평생의 난적 조훈현 9단(59)을 꺾고 차지한 감격-해원(解寃)의 타이틀이다. 서 9단의 동년배 기사들은 “고목생화”라고 함박웃음을 터뜨리며 서 9단을 헹가래쳐 주었고 서 9단은 새로운 자신감에 몸을 떨었다.
그래도 대국 전의 예상은 이민진의 우세였고 바둑도 중반 이후에는 이 7단의 절대 우세, 필승지세였는데, 그러거나 말거나 형세 유-불리에 상관없이 시종 속사포를 날리던 서 9단은 최후의 일전에서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특유의 변환술로 이 7단을 홀리면서 백 대마를 잡으러 덤비는 이 7단의 흑 대마를 거꾸로 잡고 역전 대승을 거두었다.
<1도>를 보자. 상변에서 흑1로 찔러 이 7단이 다시 한 번 전리품을 챙기는 것을 보고 서 9단이 우변 백2로 달린 장면. 여기까지는 흑은 룰루랄라, 백은 그저 경황이 없는 모습이었다.
좌하귀 쪽에는 초장에 백들 한 무더기가 잡혔고 우변 쪽에도 백 들이 숨을 못 쉬고 있으며 이제 상변에서는 백◎가 들어가면서 이곳 흑집도 엄청나게 불어났다. 집으로 도저히 추격 불가능인 상태. 시니어 팀 검토실에서는 “백이 던져도 이상하지 않다. 아~ 이민진 6연승인가. 그러면 연승 상금 500만 원? 착착 100만 원씩 올라가네…”라면서 고개를 흔들고 있었다.
<2도> 흑1로 치받자 백은 손을 돌려 상변 2쪽을 막아본다. 저기도 급하고 여기도 살리고… 바쁘다. 이민진, 가차없이 흑3, 5로 나가끊는다. 이미 많이 이겨 있지만, 그냥 우변 흑A에 젖혀 이쪽을 걷어 들이는 것으로도 충분하고 남지만, 도발은 용서하지 않겠다고 한다. 섬멸작전이다. 백6의 3-3 침입은 시간에 쫓기고 형세에 쫓기며 던져보는 응수타진이다.
<3도> 백1, 3으로 정리한 다음 백5를 선수하고, 백7로 젖힌다. 수의 선악, 수의 성립 여부를 떠나 죄우간 현란한 발놀림. 그리고 여기서 백9? 이것도 당시에는 누가 보기에도 그냥 해보는 단수, 그저 종국으로 가는, 별 의미 없는 수의 진행인 것만 같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4도> 흑1로 따낼 때 백2로 치받아 찝는 수. 흑3은 절대. 검토실에서 “헉!” 하는 소리가 들렸다. “걸렸다. 이민진이 꽁수에 걸린 것 같다!” 백2가 선수가 된 것, 이게 하이라이트였다.
꽁수는 꼼수가 바른말인데, 꽁수나 꼼수는 물론 점잖지 못한 말. 하물며 프로 바둑에서랴. 그러나 재미있는 말이다. 프로-아마 누구나 사석에서는 좋아하는 말이다. 비하도 폄하도 아니다. 서 9단이 구사한 일련의 수순은 점잖은 말로 하면 절묘한 응수타진, 그쯤 되는 것.
백4로 호구치고, 계속해서 <5도> 흑1~백8에 이르자 이제 뭐가 뭔지 모르게 되었다. 가만 보니 백을 잡으러 가던 우변 흑 대마도 미생이다. 그렇다면 수상전인가? 흑7로 파호하고 백8로 넘는 것까지도 절대. 양단수는?
<6도> 흑1의 양단수에 백2로 이을 수 있다는 것, 흑3 따낼 때 백이 넘지 않고 4로 같이 따낼 수 있다는 것, 이걸로 흑 대마가 거꾸로 잡혔으니 기막힐 노릇이다. 백으로선 절묘함의 연속, 행운의 연속인 것인데, 일이란 게 일진이 좋은 날은, 되려면 이렇게 되고 일진 사나운 날은 꼬이려면 이렇게 꼬인다. 계속해서….
<7도> 흑1, 3은 백4까지 흑이 수부족이다. <4도> 백2가 선수가 아니었다면, 백2와 흑3의 교환이 없었다면 <4도> 백4 때 흑 대마는 <8도> 흑1쪽에서 단수쳐 살아가는 수가 있다. 백A가 없으므로 백B로 이을 수 없다. 애초에 잡혀 있던 우변 백 몇 점은 살아가지만 흑도 상변은 완벽하게 구축해 여전히 낙승이었다.
그나저나 흑은 아까 백을 좀 살려주면 이겼다. 양보해도 이겼고 후퇴해도 이겼고 아무 쪽이나 한 쪽만 잡아도 이겼던 것을, 그것 참. 그러나 이 7단에게 “이그~”라는 마음은 들지 않는다. 프로는 이기는 길로 가는 게 물론 최선이지만 상대가 안 되는 걸 갖고 덤빌 때 응징하러 가는 것도 나쁘게는 보이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는, 아니 그런 면에서도 서 9단이 이 7단의 선배다. 서 9단도 예전엔 만날 그랬으니까. 그리고 그래야 져도 팬들의 사랑을 받는다.
서 9단은 신바람이 났는지 다음 날, 올 3월에 ‘여류국수’에 오른 박지연 3단(21)에게 또 이겼다. 흑을 들고 233수만에 불계승. 2연승이다.
이광구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