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핸드볼협회의 한 관계자가 다음과 같은 명언을 남깁니다.
“지금까지 한국은 다 강팀들과 상대했다. 스페인 덴마크 노르웨이 프랑스 등 어느 한 팀도 만만한 팀이 없었다. 그래도 최소한 비기거나 이기지 않았나. 오늘 8강에서도 한국은 분명 러시아를 꺾고 4강에 올라갈 것이다.”
‘간절히 바라면 이루어진다’는 말은 이번 올림픽을 통해 제대로 실감하고 있습니다. 한국은 14-11로 전반전을 수월하게 이기는 듯 하더니 후반 내내 시소 게임을 벌이다 마침내 후반 종료 직전 러시아의 파울 프리드로가 남아 있는 상황에 직면했습니다. 점수는 24-23. 만약 러시아의 프리드로가 성공하면 연장전에 돌입해야 하는 탓에 체력적으로 지쳐있는 한국으로선 그 공 하나를 어떻게 해서든 막아야 했습니다.
핸드볼 경기장마다 붉은색으로 물들이고 있는 한국 응원단의 모습. 핸드볼협회에서 준비해온 막대풍선과 태극기가 외국인들한테는 최고의 인기를 얻고 있다.(사진=이영미) |
현장에는 핸드볼협회 회장을 맡고 있는 SK 최태원 회장이 경기를 지켜보고 있었고 극적인 승리를 거머쥔 선수들을 향해 아낌 없는 박수를 보냈습니다. 아마 최 회장도 마지막 프리드로 순간에는 가슴이 조마조마했을 겁니다.
핸드볼 8강전을 지켜보며 ‘승리’라는 단어가 모두 똑같은 색깔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여자 핸드볼 선수들이 예선전을 거치는 동안 이뤄낸 승리는 모두가 다 감동이었고 특히 러시아전에서의 승리는 세상의 모든 기쁨과 희열과 행복이 함축된 듯한 멋진 ‘드라마’였습니다.
또한 여러 종목의 경기장을 다니면서 한국 응원단을 만나게 되는데, 그중에서도 핸드볼 경기장의 한국 응원단은 ‘넘버 1’입니다. 핸드볼협회에서 준비해온 막대풍선과 태극기를 외국인들에게 나눠주며 함께 응원전을 펼치는 것은 물론 모두가 한목소리로 ‘대~한민국’을 외치며 열띤 응원을 선보이는 바람에 관중석의 외국인들 한테는 최고의 관심과 인기를 모으는 대상입니다.
핸드볼협회장인 SK 최태원 회장도 직접 올림픽 경기장을 찾아 선수들을 응원했다.(사진=이영미) |
목발을 짚고 나타난 정유라와 이제 걷는 건 문제 없다는 김온아. 선수들은 이구동성으로 두 선수를 가리켜 그들의 부상으로 인해 잠시 충격을 받기도 했지만 선수들이 더욱 똘똘 뭉치게 됐던 ‘아름다운 부상’이라고 말합니다.
한국으로 돌아가자마자 큰 수술을 받아야 하는 정유라는 이런 말을 덧붙였습니다.
“내 인생에서 이렇게 심하게 부상당한 게 두 번째다. 처음에는 뼈가 부러졌는데 지금은 십자인대가 끊어져 더 어려워졌는데 신기하게도 통증이 없다. 부상 때문에 심하게 우울했지만 다행이 우리가 4강에 진출할 수 있게 돼 너무 기쁘다.”
러시아전에선 선수촌이 아닌 경기장 벤치에 앉아 선수들을 독려했던 김온아도 밝은 미소를 띠며 선수단 분위기를 전합니다.
“러시아전을 앞두고 선수들 분위기가 정말 좋았다. 밖에선 강팀 운운했지만 선수들은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예선전부터 지금까지 강팀이 아니었던 팀이 있었나. 러시아전도 경기 중 한 게임일 뿐이었다. 내가 직접 뛸 수는 없지만 선수들에게 뭔가 힘이 돼주고 싶어서 경기장을 찾았는데 막상 게임하는 거 보니까 나도 들어가서 뛰고 싶어지더라. 언니들, 동생들 모두 모두 고맙다. 첫 경기에서부터 부상을 당하는 바람에 마음 둘 곳이 없었는데, 이렇게 잘 하는 거 보니까 대견하고 자랑스럽다.”
예선전을 치르며 탄탄한 수비력을 자랑했던 여자핸드볼 대표팀이 수비와 관련해선 아직 더 보여줄 게 남았다고 하네요. 김온아의 설명에 의하면 세 가지의 수비 전술을 연습했는데 그 중에서 ‘수비5’는 노출이 안됐다고 합니다. 일명 ‘강재원 감독의 야심작’이라고까지 표현하는데요, 아마 노르웨이전에서는 그 작전이 나오지 않을까 하는 게 선수들의 예상입니다.
그때 한 선수가 휴대폰을 통해 인터넷을 검색하다가 “어? 네이버 실시간 검색어에 우리 이름이 떴다! 조효비, 권한나, 김온아, 여자 핸드볼이 나오는데?(웃음)”라며 목소리를 높입니다. 김온아가 한 마디 대꾸하네요. “내가 왜? 뛰지도 못했는데.” 그래도 싫지만은 않은 듯한 표정입니다.
김온아는 한국의 선전 비결에 대해 이런 해석을 덧붙입니다. 바로 지독한 웨이트트레이닝이 한몫한 것 같다고. 정작 훈련할 때는 강재원 감독을 원망하고 미워할 정도로 고통스럽기만 했지만 막상 올림픽에 와 보니까 그때의 체력 훈련이 선수들을 버티게 해주는 원동력이 되는 것 같다는 설명입니다.
허리 부상으로 오랜 시간 뛰는 게 힘들다고 말하는 김차연. 경기 때마다 상대 수비수들과 거친 몸싸움을 벌이는 통에 온몸이 상처투성이라는 유은희, 그리고 러시아전에서 6골을 터트리며 강재원 감독의 ‘히든카드’ 역할을 톡톡히 해낸 권한나, 골키퍼 주희, ‘비 자매’ 조효비, 이은비, 심해인, 정지해, 주장 우선희 등 여자핸드볼 대표팀에는 모두가 소중한 1인들이 존재합니다.
“앞으로 딱 두 게임 남았다. 어차피 두 번 뛰는 건데 이왕이면 결승전에서 대미를 장식했으면 좋겠다. 이렇게 고생해서 3,4위전을 뛴다면 너무 억울하고 슬플 것 같다.”
제 2의 ‘우생순’이 아닌 새로운 다큐멘터리를 만들어 가는 여자 핸드볼 선수들의 가슴 뛰는 희망사항입니다.
From 런던 이영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