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올해로 입단 50년을 맞은 조훈현 9단. 그가 세운 최연소 입단 기록은 아직까지도 깨어지지 않고 있다. |
조 9단의 기록이야 새삼 나열할 것도, 강조할 것도 없다. 반평생 자체가 그대로 기록의 보고니까. 며칠 전 바둑계 인사 한 사람을 만났다. 바둑계에서는 좋은 의미의 기인으로 통하는 인물이다. 이런 저런 얘기 끝에 그가 말했다.
“우리 바둑계에 공로자랄까, 은인이랄까, 누굴 꼽으시겠어요?”
“글쎄요, 많겠지요, 뭐.”
“많을까요? 저는 세 사람 같아요. 조남철 선생님, 조훈현 9단, 그리고 조치훈 9단.”
“그 분들이야 당연히 들어갈 것이고… 그래도 몇 사람 더 있지 않을까요?”
“따지고 보면 많겠지요. 그러나 공로의 크기로 세 분 조 선생에 비할 사람은 없습니다.”
“조훈현 9단은 가끔 구설수에도 오르는데.^^”
“하하하. 저는 그런 걸 전부 커버하고도 남는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걸 다 갖추길 요구하는 것은 무리겠지요.”
“우칭위엔, 오청원 선생 같은 예도 있지 않나요?”
“음. 오 선생님은 물론 우리 같은 범부가 왈가왈부할 분이 아니시지만, 그 분에 대해서는 적지 않은 부분이 뭐랄까요, 만들어진 내용도 있는 것 같거든요. 만들어졌다고 하는 게 외람된 말이긴 하지만 적당한 표현이 없네요.^^”
조훈현 9단이 일본 유학에서 돌아와 국내에서 활동을 시작한 것이 1972년이니 그때로부터도 이제 만 40년이다. 요즘은 조 9단을 개인적으로 만나는 기회가 거의 없지만, 1980년 시즌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 20여 년 동안은 멀리서 가까이서 자주 볼 기회가 있었다. 기억에 남아 있는 스냅 가운데 두서없이 몇 장을 들추어 본다.
1982년 여름에서 가을 사이, 그때 조 9단은 한국 최초로 대망의 9단에 올랐고 제2차 천하통일을 이루었다. 인터뷰를 하면서 물었다.
“다시 일본에 갈 생각은 없으신지?”
조 9단은 예의 눈을 찡그리는 표정으로 한참을 생각하다가 말했다.
“갈 수가 있나요?”
대답은 그 한마디였다. 해석은 각자의 몫이었다.
“만약 가신다면 성적은 어느 정도?”
“타이틀은 몰라도 본선이야 뭐, 하하하.”
1980년대 중반의 어느 날. 조 9단과 서봉수 9단이 한국기원(관철동) 특별대국실에서 도전기를 두고 있었다. 그 전날 마침 일본에서는 조치훈 9단이 다케미야 9단인가하고 도전기 한 판을 끝낸 날이었다. 당시는 조치훈 9단의 기보는 일간지에서 보도를 하던 때였다.
서봉수 9단이 장고에 빠진 사이 조 9단이 한국기원 직원에게 “조치훈 기보 신문에 난 거 있으면 좀 보여달라”고 부탁했다. 직원이 신문을 갖고 오자 조 9단은 의자에 앉은 채로 가끔 특유의 다리떨기도 보여 주면서 총보를 읽었다. 총보란 바둑 한 판을 기록한 것. 흑1부터 숫자가 들어가 있는 흑백의 동그라미들이 빽빽했다. 바둑이 200 몇 수에 끝났으니까.
점심 시간이 되어 일어날 때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조 9단에게 물었다.
“패착이 뭔가요?”
대답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아니, 기대한 것은 “놓아봐야 알지 그걸 어떻게?” 정도였다. 그러나 조 9단은 덤덤하게 말했다.
“백64가 이상했던 것 같은데….”
나중에 밝혀진 내용은 그대로였다. 내 귀로 들었으니 확실한 사실이다.
1990년대 후반의 어느 날. 필자는 그때 바둑 주간지에 ‘조훈현과의 대화’라는 칼럼을 연재하고 있었다. 한 주에 주제 하나. 그 즈음에 두어진 국내외 주요 바둑 가운데 내용이 좋은 한 판을 골라 승부처 위주로 조 9단이 해설하는 칼럼이었다. 매주 하나씩 해설하고 듣기에는 좀 그래서 한 번 만날 때 한 달치 4회분을 들었다.
조 9단을 만난 곳은 주로, 관철동 한국기원 회관 5층 현현각 사무실이었다. 약속 시간에 가면 조 9단은 게임을 하고 있거나 다른 사람의 게임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러다 짬이 나면 바둑판 앞에 앉아 해설할 바둑의 문제 장면을 만들고 코멘트를 시작했다.
그런데 기보를 보고 장면을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니라 양 손에 흑백 바둑알을 한웅큼씩 들고 주루룩 ‘조립해 가는’ 것이었다. 빠르면 한 주 전, 좀 늦으면 두어 달 전에 두어진 다른 사람의 기보를, 그것도 기보 자체를, 그것도 보통 네 판 정도를, 수순의 진행을 외우고 있는 것이 아니라 문제 장면의 모양이 나오기까지, 거기까지의 형태를 그냥 무순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너무나 당연한 얘기지만, 그럴 때 느끼는 상대적인 열패감이란.
조훈현 9단은, 이제는 더 이상 성적을 내거나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도 아까 그 기인의 얘기는 틀림이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한국 현대 바둑의 세 사람은 조남철 조훈현 조치훈이다. 그 중에서 또 한 사람만을 가리자면? 글쎄, 그런 건 별로 의미가 없지 않을까.
이광구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