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남 드래곤즈에서 임의탈퇴 당한 이천수가 10월 21일 광양전용구장을 찾아 팬들에게 허리 숙여 사과하고 있다. |
10월 21일에 벌어진 일이었다. K리그 전 소속팀 전남 드래곤즈와 인천 유나이티드 간의 올 시즌 K리그 36라운드가 열린 광양축구전용구장에 이천수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모교에서 축구 좋아하는 후배들에게 ‘재능 기부’를 한다는 거창한(?) 명목으로 포장돼 슬그머니 등장하려다가 오히려 “언론 플레이를 하려 한다”는 뭇매를 맞고 자취를 감춘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물론 이전에도 이천수의 ‘언론 플레이’는 유명했다. 그러나 원했던 결과를 얻지 못했다. 대부분 어설픈 타이밍 선택으로 더 궁지에 몰리곤 했다. 이번 광양 방문도 예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번에 이천수가 내놓은 설명은 역시 그럴싸했다. “팬들에게 사과하겠다는 생각으로 순수한 마음에 이곳을 찾았다. 앞으로도 계속 경기장을 찾아 사과드리겠다.”
이날 이천수는 경기장에 입장하는 관중을 향해 일일이 고개 숙이며 자신의 잘못을 용서해달라고 빌었다고 한다.
하지만 여전히 진정성에는 의문이 남는다는 게 상당수 축구인들의 생각이다. 그의 말대로 ‘순수함’도 크게 느껴지지 않았다. 이천수의 행적을 오랫동안 지켜봤던 한 유력 축구인은 “이천수가 뭘 반성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직접 피해를 입은 구단에게 최소한 도리도 하지 않았는데, 전혀 연계가 없고, 잘못과 상관없는 팬들에게 무슨 사과를 하겠다는 거냐”고 고개를 저었다.
실제로 이날 경기장 방문을 하기 전 이천수는 전남 구단에 전혀 연락을 하지 않았다. 평소처럼 돌출 행동이었다. 하필 안정환 K리그 명예홍보팀장의 방문과 겹쳤다. 전남 관계자들은 “(이천수가 오는 걸) 당연히 몰랐다. 왜 왔는지 모르겠다. 가뜩이나 팀이 어수선할 때 정말 이해하기 어렵다”며 불쾌하다는 반응을 먼저 보였다. “핵심은 진정성의 여부다. 진정으로 잘못을 느끼고 있다는 걸 우리가 알기 전에는 용서할 수 없다. 이번에도 예의 언론 플레이처럼 보여진다. 문득 생각났다는 듯 찾아와 어설프게 인사하고 돌아가는 형식으로는 어림도 없다”고까지 했다.
이렇듯 사태 해결의 열쇠를 쥔 전남은 이천수를 아직 용서할 계획이 없다. 그라운드에 발을 들여놓은 이후 연이은 돌출 행동으로 ‘한국 축구 최고 기행 꾼’이 된 이천수는 2009년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저질렀다. 자신을 질책하는 박항서 전 감독(현 상주 상무)과 하석주 전 수석코치(현 전남 감독) 등 코칭스태프에게 거친 욕설을 퍼부은 것도 모자라 몸싸움까지 불사했다. 결국 이천수는 구단을 무단이탈했고, 전남은 그를 임의탈퇴 선수로 처리했다. 이후 사과 한마디 없이 지난 시즌까지 일본 J리그 오미야에서 뛰었고, 계약기간 종료와 함께 소속팀이 없어 경기에 나서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 이천수가 현장으로 복귀하기 위해선 가장 먼저 전남의 동의를 구해야 한다.
그런데 이번에는 특히 이상했다. 시기도, 정황도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았다. 당시에 이천수가 광양을 방문했다는 소식을 마치 기다렸다는 듯, 발 빠르게 외부로 알린 것이 트위터나 페이스북 등등 일부 팬들의 활발한 SNS 서비스 등이 아닌, 공식적인 루트라는 점은 특히 묘했다. 현장을 찾았던 몇몇 매체들이 온라인 뉴스로 이천수의 사과 소식을 내보내자 프로축구연맹(총재 정몽규)이 곧바로 이천수의 광양 방문 사진 5장을 보도자료로 배포했다. 경기 전반전이 한창 진행 중이던 오후 3시44분 무렵이었다. 프로연맹은 “(언론들의) 사진 제공 요청이 많았다”고 사진 배포 이유를 설명했지만 동조를 구하기는 어려웠다. 연맹에서 전속 사진기자를 안정환의 방문에 맞춰 광양에 파견했다지만 속 시원한 이유는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프로연맹이 전남과 이천수의 관계에 대해 공식적으로 언급한 적이 없었던 탓이다. 더욱이 프로연맹 내부에도 이천수의 복귀를 썩 반기지 않는 의견들도 많이 있었다는 점을 보면 더욱 그랬다.
일단 프로연맹이 이천수에 갑자기 관심을 가진 내막이나 정확한 이유는 나오지 않았지만 일부에서는 축구계 최고 윗선의 입김이 작용하지 않았느냐는 의혹들이 증폭되고 있는 상황이다. 한 유력 축구계 인사에 따르면 대한축구협회 정몽준 명예회장이 최근 프로연맹 고위 관계자가 포함된 몇몇 지인들과 만났는데, 바로 이 자리에서 이천수의 복귀와 관련된 이야기를 언급했다는 것이다. 실제 프로연맹 정몽규 총재와 정 명예회장 간의 가족 관계를 염두에 둔다면 충분히 가능한 시나리오다.
몇몇 축구인들은 “마치 ‘이천수 구하기’ 프로젝트가 가동된 것 같다. 정 명예회장은 평소부터 이천수를 각별하게 아껴왔다고 들었다. 지난 7월 2002한일월드컵 기념식에서도 김주성 축구협회 사무총장에게 ‘이천수를 좀 도우라’는 이야기를 건네기까지 했다. 그런데 이천수를 용서하는 문제는 전적으로 포스코와 전남 구단이 할 일”이라고 꼬집었다.
남장현 스포츠동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