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우대영 ‘OB 우승멤버’로 박철순과 원투펀치 활약…김일환, ‘전설의 경기’서 최동원에게 타점 뽑아
선우대영의 선수 생활은 2년밖에 안 된다. OB 베어스의 초대 한국시리즈 우승을 이끌었던 그는 이듬해인 1983년 시즌 중반 어깨 부상으로 미국으로 건너가 수술받은 후 은퇴 수순을 밟았다.
김일환은 롯데보다 해태에서 활약했던 시기가 전성기였다. 1988년에 태평양 돌핀스로 이적했다가 1989년 다리 근육 부상으로 은퇴했다. 해태에서 우투수 전문 대타로 활약할 당시 1983년 한국시리즈 우승에 기여했다.
1982년, 1983년 한국시리즈 우승과 인연이 있는 두 사람을 애틀랜타에서 직접 만났다.
선우대영은 애틀랜타에서 보안업체를 운영하고 있다. 자본금 5000불을 갖고 35년 전에 시작한 회사가 지금은 크게 성장해서 20명이 넘는 직원을 둔 안정적인 사업체로 자리잡았다.
“처음에는 고생 많이 했다. 세탁소 일도 하고, 마트 계산대에서 일한 적도 있다. 당시 유학생들이 내 얼굴을 알아보고 “여기서 뭐하냐?”라고 묻기도 했다. 창피해서 교회도 못 다녔을 정도다. 그러다 우연히 보안업체 일을 접하게 됐고, 처음에는 트럭 한 대 갖고 이 일에 뛰어들었다. 보안 카메라, 화재 예방 등 보안 경비 시스템이 주 업종인데 애틀랜타에 한인들이 운영하는 가게가 많아 사업 확장에 적잖은 도움을 받았다.”
선우대영은 서울고, 중앙대학교를 거쳐 OB 베어스 지명을 받고 베어스 원년 멤버로 프로 생활을 시작했다. 미국에서 돌아온 박철순과 함께 OB 베어스 원투 펀치이자 좌완 에이스로 맹위를 떨쳤다.
선우대영한테 선수 생활 최고의 순간은 바로 1982년 초대 한국시리즈일 것이다. 그는 삼성과의 한국시리즈 1, 3, 5차전에 출장했고, 3차전에서는 선발 투수로 등판해 OB 베어스 최초의 한국시리즈 첫 선발승을 거뒀다. 1983년 시즌 중반에 어깨뼈 힘줄이 끊어지는 부상으로 미국에서 수술 받은 후 다시 마운드에 오르지 못하고 은퇴하게 된다.
선우대영은 삼성과의 한국시리즈 1차전을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한국시리즈를 앞두고 시즌 22승을 거둔 (박)철순 형이 허리 부상으로 서울대 병원에 입원했다. 에이스의 부재로 1차전 선발은 강철원이 나섰다. 강철원이 8회까지 3-2로 잘 던지다 9회초 삼성 배대웅의 2루타가 터지면서 3-3 동점을 이뤘다. 10회 연장전부터 내가 등판했고, 15회까지 무실점으로 경기를 마쳤다. 삼성도 황규봉과 (이)선희 형을 투입시키며 15회를 3-3 무승부로 끝냈다.”
2차전 OB 선발은 계형철이었고, 삼성은 이선희를 내세웠다. 그러나 이 경기에서 OB는 0-9 참패를 당했다. 선우대영은 3차전 선발을 앞두고 있어 미리 서울로 이동했다고 한다.
“3차전을 앞두고 선수단 내부에서 병원에 있는 (박)철순 형이 합류할지 모른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그만큼 3차전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소문은 사실로 나타났다. 철순 형이 척추에 진통제를 맞고 야구장에 나타난 것이다. 우리가 3-1로 앞선 상황에서 삼성이 6회초 1사 1, 3루의 기회를 맞이하자 김영덕 감독님이 나를 내리고 철순 형을 마운드에 올렸다. 이후 2실점을 했지만 OB 타선이 뒷받침되면서 결국 5-3으로 이겼고, 1승 1무 1패 동률을 이뤘다. 그때부터 철순 형의 별명이 ‘불사조’였다.”
선우대영은 1무 1패를 이룬 상황에서 3차전 선발로 나서는 게 굉장히 부담스러웠다고 회상한다.
“꼭 이겨야만 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1차전과 달리 3차전에서는 구속이 잘 나오지 않았다. 시즌 내내 많은 공을 던졌던 게 좋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6회 마운드에 오를 때도 내심 감독님이 교체해주길 바랐는데 그때 (박)철순 형과 교체된 것이다. 철순 형이 마운드로 걸어 나오는 모습을 보고 속으로 ‘이제 됐다’ 싶었다.”
3차전에서 선우대영이 OB 베어스 최초의 한국시리즈 승리 투수가 됐다면 박철순은 OB 최초로 한국시리즈에서 세이브를 거둔 선수였다.
4차전 OB 선발은 강철원이었고, 삼성은 또 이선희를 선발로 내세웠다. 이 경기는 OB가 경기 내내 삼성한테 리드를 허용하다 5회 5득점을 올리며 7-6으로 역전승을 이룬다. 박철순은 4차전에서도 구원 등판했다. OB는 이 경기 승리로 시리즈 전적을 2승 1무 1패로 뒤집을 수 있었다.
“5차전 선발이 나였다. 우리 타선이 일찌감치 터지면서 4-2로 리드를 하다 7회초 내가 삼성의 대타 박찬한테 2점 홈런을 허용하는 바람에 동점을 이뤘다. 그러다 9회말 김경문의 희생번트와 유지훤이 (이)선희 형을 상대로 좌익수 앞에 떨어지는 끝내기 안타를 터트린 덕에 5-4 승리를 거뒀다.”
5차전 이후 하루를 쉬고 맞붙은 6차전 선발은 5차전에서 휴식을 취한 박철순이 맡았다. 삼성은 또 이선희를 선발로 내세웠다. 박철순은 진통제 투혼을 펼쳤다. 8회까지 3-3 동점으로 팽팽하게 진행된 경기가 9회초 밀어내기 볼넷으로 4-3 역전을 이뤘고, 이후 김유동이 이선희의 초구를 받아쳐 만루홈런을 터트리며 8-3 승리를 거뒀다. 허리가 좋지 않았음에도 박철순은 9회까지 3실점 완투승으로 마운드를 지켰고, 선수들의 희생과 노력 덕분에 프로야구 초대 우승은 OB 베어스의 차지가 됐다.
영광의 순간, 우승의 기쁨과 감동의 여운은 오래가지 않았다. 박철순은 이후 허리 부상으로 좋은 공을 던질 수 없었고, 선우대영은 이듬해인 83년 시즌 중반 어깨 힘줄이 끊어지는 부상을 당한 것이다.
“야구를 더 하고 싶어서 미국까지 건너가 수술을 받은 건데 수술 이후에도 좀처럼 구속이 나오지 않았다. 눈물을 머금고 은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미국으로 건너온 후에는 한동안 한국 야구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50세 넘어서까지 야구 꿈을 꿨을 정도로 선수 생활에 대한 회한이 많았다. 지금은 다 털어낸 옛 이야기일 뿐이다.”
선우대영은 KBO 통산 2시즌 동안 44경기 234⅔이닝 11승 12패 평균자책점 3.61, 11완투 2완봉을 기록했다.
김일환은 실업팀 한국화장품에서 뛰다 롯데 자이언츠 창단 멤버로 프로 생활을 시작했다. 롯데에서 활약한 시즌은 1982년 한 시즌이었고, 1983년부터 1988년 6월까지 해태 선수로 뛰다 1988년 6월 20일 태평양 돌핀스로 현금 트레이드돼 한 시즌 반만 활약한 뒤 은퇴했다.
은퇴 후 미국으로 이민을 간 김일환은 한국에서 자수 실을 수입해 미국에서 판매하는 일을 시작했다가 애틀랜타에 ‘하얀풍차’라는 제과점을 개업해 5개의 분점을 내는 등 사업을 확장했지만 지금은 은퇴 개념으로 본점 하나만 남겨두고 다 정리했다고 한다.
김일환한테 최고의 경기는 1987년 5월 16일 선동열과 최동원의 맞대결로 엄청난 화제를 모았던 사직 롯데전이다. 이 경기는 영화 ‘퍼펙트 게임’으로도 소개됐을 정도다. 당대 최고의 라이벌로 손꼽혔던 최동원과 선동열은 앞선 맞대결에서 1승 1패를 이뤘다. 1987년 5월 16일 사직 롯데전은 이들한테 세 번째 맞대결이자 마지막 승부이기도 했다.
이 경기는 연장 15회까지 총 4시간 56분의 혈투를 벌였고, 양 팀 다 선발투수가 완투를 벌인 한국 프로야구 역사상 최고의 명승부로 손꼽힌다.
김일환은 이 경기에서 선발로 뛰지 못했다. 대타 전문 요원답게 결정적인 순간에 대타로 출전해 드라마 같은 타점을 올렸다. 다음은 김일환의 설명이다.
“8회까지 우리가 1-2로 롯데한테 끌려가고 있었다. 9회초 한대화가 중전안타로 출루한 가운데 김응용 감독님이 다음 타자인 포수 장채근을 빼고 나를 대타로 내세웠다. 1사 2루 상황에서 대타로 타석에 들어가 무조건 직구 하나를 노리고 있었는데 마침 빠른 공이 들어와 타격했던 게 우월 2루타가 돼 2-2 동점을 만들었다. 그 타점이 그날의 경기를 무승부로 끝나게 한 중요한 포인트였다.”
9회 2-2 동점을 이룬 이 경기는 15회까지 연장전으로 이어졌고, 4시간 56분의 혈투는 양팀 선발 15이닝 2실점 완투라는 이색 기록을 남긴 채 무승부로 막을 내렸다. 선동열은 한 경기 최다 투구수인 232개를 던지며 56타자를 상대했고, 최동원은 209개의 공으로 60타자와 맞붙었다. 선동열은 7피안타 6사사구 10탈삼진 2실점을, 최동원은 11피안타 7사사구 8탈삼진 2실점을 기록했다. 김일환의 설명이 이어진다.
“만약 내가 좀 더 앞 이닝에 대타로 나갔다면 최동원의 공을 칠 수 있었을까 싶다. 9회 되니까 최동원의 구위가 떨어졌고, 더그아웃에서 언제 대타로 나갈지 모른다는 생각에 경기 후반부터 최동원의 공을 분석하며 대기하고 있었다. 그러다 김응용 감독님이 9회 대타로 나가라는 지시가 떨어진 것이다.”
김일환은 2루타를 치고 베이스를 밟은 후 대주자로 교체돼 더그아웃으로 들어왔고, 이후 15회까지 경기가 진행되는 걸 벤치에서 지켜봤다고 한다.
KBO리그 역사상 가장 위대한 라이벌인 최동원과 선동열의 세 차례 맞대결은 1승 1무 1패로 마무리됐고, 3경기 모두 사직구장에서 펼쳐졌으며 모두 완투했다는 점도 이색적인 기록이다.
“최동원, 선동열 모두 세기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대단한 투수들이었다. 선동열은 불펜에서 몸만 풀고 있어도 상대 팀에서 주눅이 들 정도였다. 당시 김응용 감독님이 8회 엎치락뒤치락하는 상황이 되면 선동열에게 불펜 가서 몸 풀고 있으라고 말했을 정도다. 상대 팀에 긴장감을 심어주기 위함이었다. 이런 투수들과 동시대에 같이 야구할 수 있었다는 게 정말 행복했다.”
얼마 전 ‘전설의 타이거즈’라는 유튜브에 출연한 김성한이 가장 보고 싶은 선배로 김일환을 뽑은 적이 있었다. 김성한은 김일환에 대해 “방망이 한 자루로 외롭게 야구 생활을 했던 선배다. 만나서 꼭 식사 한 끼라도 하고 싶다”라고 말한 바 있다. 김일환은 지인을 통해 김성한의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고 한다. 그는 기자에게 김성한의 연락처를 물었다. 한국 갈 때 자신이 직접 연락해 만날 것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김일환은 우투수 전문 대타 요원이었지만 1983년 한국시리즈에서는 김응용 감독이 그의 경험을 높이 평가해 2번 붙박이 1루수로 기용했고, 김일환은 감독의 믿음에 보답이라도 하듯 4할의 맹타를 휘두르며 한국시리즈 우승에 크게 공헌했다.
아마추어 시절 팔꿈치를 크게 다쳤던 김일환은 그 후유증으로 풀 스윙을 하지 못해 프로 원년부터 은퇴할 때까지 446경기 1075타석에서 단 한 개의 홈런도 기록하지 못했다.
미국 애틀랜타=이영미 스포츠전문기자 riveroflym@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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