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빤 대전스타일’ 대전 시티즌의 김형범이 지난 3월 18일 FC 서울과의 경기에서 드리블하고 있다.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
# 인생을 바꾼 임대
시즌 막바지로 치닫고 있는 올 시즌 프로축구 K리그에서 가장 강력한 인상을 남기는 임대 선수가 있다. 바로 대전 시티즌 미드필더 김형범(28)이다. ‘디펜딩 챔피언’ 전북 현대에서 임대돼 자줏빛 유니폼을 입게 됐다.
대전의 올 시즌 전망은 어두웠다. 유력한 강등 후보로 거론됐고, 실제로 성적은 좀처럼 하위권에서 탈출하지 못했다. 꼴찌 탈출은 요원해 보였다. 그때 김형범이 혜성처럼 등장했다. 전북에서 영웅으로 올랐던 과거가 다시금 재현되는 분위기다.
공격 포인트는 11월 14일 현재, 어느덧 15개가 됐다. 5득점을 했고, 어시스트를 10차례나 했다. 김형범이 터지니 대전도 살아났다. 순위표 맨 아래에서도 탈출한데 이어 이제 생존 그 이상을 바라보고 있다. 대전 유상철 감독도 “김형범이 없다면 지금 대전의 위치(순위)는 더 아래에 있었을 것”이라며 엄지를 치켜세운다.
사실 김형범에게는 잊고 싶은 고통스러운 과거가 있었다. 한국 축구를 대표하는 ‘유리 몸’이었기 때문이다. 대전의 꼴찌 탈출이 그랬던 것처럼 김형범의 부상 극복도 요원해 보였다. 몸을 사리지 않던 투지를 장점으로 내세웠던 그였지만 잊을 만하면 다시금 따라붙는 부상 악령에 울었다.
하지만 현재 상황만 놓고 보면 훌훌 털어냈다. 넘어지고 또 넘어져도 그라운드를 내달리는 모습이 감동을 준다. ‘임대생’ 김형범을 향해 “어차피 올해가 끝나면 전북으로 되돌아갈 선수”라며 좀처럼 마음을 열지 않던 대전의 동료, 후배들도 이제 (김형범을) 확실히 믿는다. 대전 벤치의 믿음 못지않은 긍정의 기류가 김형범을 중심으로 형성돼 있다.
▲ 이승렬 |
하지만 그와 같은 아픔마저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울산에서 화려했던 옛 시절의 진가를 되찾아가고 있다. 이승렬은 “정말 뭘 해도 자신이 넘쳤던 과거로 돌아가고 있다. 단순히 ‘그렇게 좋은 시절로 되돌아가고 싶다’는 게 아니다. 실제로 많이 나아졌다. 아직 100%까지는 아니지만 만족스러운 플레이가 많아지고 있다. 컨디션도 전성 시절의 80%까지 끌어올렸다”고 자신했다.
J리그 시미즈 S펄스로 임대된 FC서울 공격수 김현성(23)도 임대를 통해 밝은 내일을 바라보는 선수다. 서울에서 철저한 백업이었고 출전 기회조차 장담할 수 없는 기대주에 불과했지만 시미즈에서 꾸준한 출전으로 경기 감각을 유지하고 경험을 쌓고 있다. 김현성 측근들은 “임대를 통해 부지런히 성장해나가고 있다”고 흐뭇해했다.
여기에 분데스리가 아우크스부르크의 핵심으로 활약 중인 국가대표 미드필더 구자철(23)도 성공적인 임대 케이스다. 처음 몸 담았던 원 소속 팀 볼프스부르크에서 구자철의 역할은 미미했다. 좀처럼 출전 기회를 잡지 못했고, 어렵사리 찾아오는 찬스도 극히 적었다. 자칫 최악의 수렁에 빠질 뻔했다. 그 때 임대가 살렸다. 아우크스부르크에서 이제 구자철은 최고 영웅 중 하나로 통한다. 지난 시즌에는 강등 위기에서 탈출시켰다. 필요할 때마다 한 방씩 터뜨리는 공격 포인트도 구자철의 진가를 다시 보게끔 했다.
▲ 구자철. 로이터/뉴시스 |
비싼 돈을 들여 어렵사리 데려온 선수가 팀에 녹아들지 못해 벤치만 달군다면? 그것처럼 답답한 일은 또 없다. 해당 선수도 죽을 맛이고, 해당 구단도 최악의 선택을 한 죄로 좌불안석 상황에 처하게 된다. 스포츠는 철저하고 냉정한 승부의 세계다. 제 몫을 못한다면 도태되는 건 당연하다. 뛸 자리는 한정돼 있고 설 자리는 좁다. ‘실력이 괜찮다’ 정도로 꾸준히 뛸 수 있는 기회를 잡는 건 아니다. 그 때 임대 이적이 이뤄진다.
모두에게 ‘윈-윈(Win-Win)’ 계약이 될 수도 있다. 돈벌이에 혈안이 된 구단들이 헐값에 주축 선수를 넘기는 웃지 못할 결정이 이뤄지는가 하면, 선수도 살고 구단도 현실적인 선택을 동시에 할 수 있는 경우도 나온다.
최순호 서울 미래기획단장은 과거 내셔널리그 울산현대미포조선과 강원FC 사령탑 시절부터 줄곧 “K리그에도 임대가 활성화돼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구단들은 선수 영입에 필요한 비용을 줄이고, 선수들은 기량을 살릴 수 있는 기회로 임대 이적만 한 게 없다는 얘기다. 당장 성적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보다는 금전적인 손익을 철저히 따져야 한다는 것. 비싼 돈을 들여 데려온 선수가 제대로 뛰지 못하고, 현재 팀에 맞지 않으면 연봉이라도 줄여 손실의 폭을 좁혀나가는 게 현명하다는 생각도 있다.
또 다른 시민구단 감독도 “임대가 지금보다 많아져야 모두가 살 수 있다. K리그의 내실화 달성을 위해 팀에 맞는 상황을 선택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남장현 스포츠동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