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2삼성화재배 결승에서 맞붙게 된 구리 9단(왼쪽)과 이세돌 9단. |
박정환과 구리가 붙게 되었으면 제일 재미있는 카드였겠지만, 이세돌-구리도, 몇 년 전부터 ‘치수고치기10번기’다, ‘세기의 대결’이다 하면서 설만 무성하고 정작 성사는 되지 않았던 터라 이제는 시효가 좀 지난 느낌도 있지만, 그래도 더 늦기 전에 아무튼 어떤 식으로든 한번 결판 내는 걸 보고 싶은 마음이 있는 까닭일 것이다.
엊그제 대전 삼성연수원에서 끝난 준결승 3번기에서 이세돌은 아끼는 후배 최철한 9단을, 구리는 이름이 비슷해서도 그렇지만 수영의 박태환 선수를 연상시키는 박정환 9단을 2 대 0으로 물리쳤다.
누가 이길지 섣불리 예상할 수 없고 네 사람의 바둑은 모두 빡빡한 대결이 될 것이라는 예상이 빗나간 셈이다. 구리 대 박정환의 일합이 특히 그랬다. 3번기니까 2 대 0은 얼마든지 가능한 스코어. 관중석에서 고개를 갸웃거린 것은 스코어보다는 바둑의 내용이었다.
3번기의 첫 판은 승부가 일찍 갈렸다. 대마 공방의 와중에서 박정환은 구리의 대마를 일단 가두어 잡았는데, 구리의 역습에 거꾸로 박정환의 대마가 궤멸하고 말았다. 2국에서는 박정환이 멋지게 반격하는 모습을 잔뜩 기대했으나 허사였다. 구리는 중천을 지난 해고, 박정환은 중천에 가장 근접한 해인 줄 알았는데, 어떻게 된 일인지.
결과가 드러나자 한국기원 기자실에서 대국을 지켜보던 취재진 가운데 젊은 바둑기자 한 사람이 “주최 측에선 좋아하겠다”면서 쓴웃음을 지었다. 중국이 이기면 늘 나오는 푸념의 하나다. 우리 팬들은 실망하지만, 중국을, 중국 시장을 염두에 두고 있는 후원사는 좋아한다는 재미있는 모순. 가벼운 푸념을 신호로 설왕설래가 이어졌다.
“요즘은 결승전이 벌어져도 열광하거나 하는 분위기가 없지? 잔치는 많아졌는데 열기는 예전만 오히려 못한 것 같아. 잔치가 너무 자주 열려서 그런가?”
“그렇기도 하겠지만, 볼 거리가 줄어들어 그럴 거야. 전에는 누가 지존이냐 하는 궁금증 외에도 볼 거리가 이것저것 많았거든. 안 그래?”
“이벤트랄까, 팬 서비스랄까, 연구가 별로 없어서 그렇지. 이세돌-구리라면 빅 카드인데, 비슷한 빅 카드라 하더라도 한번 비교해 보자구. 가령 이전의 이창호-창하오라든가, 이창호-마샤오춘이라든가, 그때는 지금보다 훨씬 열기가 느껴졌거든.”
“열기로 말하자면 거슬러 올라갈수록 더했던 것 아닌가. 조훈현-고바야시, 조훈현-녜웨이핑, 또 조치훈-고바야시, 조훈현-조치훈, 조훈현-서봉수 등등 말이야. 그 시절에는 그들이 붙는다 하면 그야말로 떠들썩했잖아. 요즘은 어떻게 된 게 주최-후원 쪽에서 가능하면 행사를 조용히 치르자, 심하게 말하면 그런 거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거든.”
“언론이 관심을 덜 가져주어서 그런 것도 있지 않을까. 예전에는 정말 바둑 동네에서 신문사 같은 데가 먼저 요란하게 북을 치고 그랬는데, 요즘은 그런 데가 별로 없잖아.”
“1990년대, 2000년대, 그때는 우리가 세계 정상을 차지하던 시기였지. 지금은 정상을 꽤 오래 누렸으니까, 정상이 되기 전하고 된 후와는 아무래도 좀 다른 것 아냐?”
“그렇기도 하지만, 꼭 그런 것만도 아니지. 더 거슬러 올라가 보자구. 80년대 조훈현-서봉수 시절에는 우리끼리도 대단했잖아. 더 올라가면 가령 서봉수-조치훈은 어땠어? 70년대 중반이었는데, 40년 전인데도 기억나지? 전화대국 같은 거 센세이션이었잖아. 열정이 있고 연구를 하면 지금도 그런 걸 왜 못하겠어.”
잔치는 풍성해 먹을 건 많은 것 같은데, 맛은 덜해지는 느낌. 그것도 다 세월이 변하고 입맛이 달라져서 그런 것인지.
이광구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