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로야구 선수협회 총회에 참석한 박재홍 회장(오른쪽)이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연합뉴스 |
“해도 해도 너무한다. 구멍가게도 저렇게 약속을 어기진 않는다. 선수들이 ‘한 번 속지, 두 번 속느냐. 강하게 나가라’고 요구한다. 만약 프로야구에 불행한 사태가 발생한다면 그 모든 책임은 KBO와 구단이 져야 한다.”
11월 29일 선수협 사무실에서 만난 박충식 사무총장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전날 선수협은 보도자료를 통해 ‘한국시리즈가 끝나고 한 달이 지나도록 KBO와 구단들은 10구단 창단을 결정하기는커녕 연내 이사회 소집마저 차일피일 미루고 있다. 10구단 창단이 더 미뤄져서는 안 되기에 선수협이 단체행동에 나서기로 결정했다’고 발표했다.
단체행동엔 골든글러브 시상식, WBC, 전지훈련 불참 등이 포함돼 있다. 만약 선수협이 실제로 단체행동에 나선다면 내년 프로야구는 사상 최악의 파행이 예상된다.
박 총장은 “이미 KT와 수원시가 10구단 창단 의사를 밝혔다. 그러나 KBO는 몇몇 구단의 비협조 때문에 이사회 일정조차 못 잡고 있다. 몇몇 구단이 비협조로 일관하는 건 10구단을 안 하겠다는 뜻이나 마찬가지”라며 “선수협이 대승적 차원에서 양보했으니, 이젠 구단들이 양보할 차례”라고 주장했다.
박 총장이 언급한 ‘선수협의 양보’는 지난 6월의 올스타전 참가를 뜻한다. 당시 KBO 이사회가 10구단 창단 유보 결정을 내리자 선수협은 강력하게 반발하며 올스타전을 보이콧하기로 결의했다. 여론도 선수협의 결정을 지지했다.
▲ 박충식 사무총장 |
결국 선수협은 이사회와 KBO의 약속을 믿고 올스타전 불참 결의를 철회했다. 그리고 시즌이 끝날 때까지 지켜봤다. 그러나 11월이 되자 이사회의 태도가 돌변했다. 10구단 창단 승인을 다뤄야 할 11월 정기 이사회가 간담회 형식으로 대체됐고, 12월 이사회는 각종 시상식과 대통령 선거를 핑계로 무산 위기에 놓였다.
모 구단 사장은 “이사회가 열리지 않으면 10구단 창단 승인안을 논의할 수 없다”며 “몇몇 구단 사장이 합심해 이사회를 열지 않으려는 건 10구단 창단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려는 꼼수”라고 지적했다.
이 사장은 “선수협이 ‘왜 당신들은 약속을 지키지 않느냐’고 따져도 몇몇 구단 사장들의 태도는 변하지 않을 것”이라며 “모그룹 오너들의 ‘10구단 창단 반대’ 담합이 풀리지 않는 이상 몇몇 구단은 10구단 창단 방해공작을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박 총장은 “이사회가 약속만 지켰어도 선수협이 벼랑 끝 전술을 시도하진 않았을 것”이라며 안타까워했다. 박 총장은 “구단 사장들이 12월 이사회를 열어 10구단 창단을 승인한다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며 퇴로를 열어 놨다.
KBO 양해영 사무총장은 선수협의 총공세에 당황한 기색이다. 양 총장은 “구단 사장들도 이사회 개최 필요성을 느끼고 있다”며 “지금 분위기라면 12월 이사회는 반드시 열릴 것”이라고 내다봤다.
하지만, 야구계의 전망은 회의적이다. 설령 이사회가 열린다손 쳐도 10구단 창단을 승인할 가능성이 적다는 게 이유다. 모 야구인은 “12월 이사회에서 ‘10구단 필요성은 인정한다. 하지만 승인은 심사숙고 차원에서 내년으로 미루자’고 결의할 가능성이 크다”며 “모그룹이 가장 두려워하는 정치권이 개입하지 않는 한, 이사회가 당장 10구단 창단을 승인하긴 어려울 것”으로 전망했다.
선수협도 이를 잘 안다. 박 총장은 이사회 압박의 마지막 카드로 정치권을 활용할 생각이다. 박 총장은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 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 캠프에 공개 질의서를 보낼 계획이다. 10구단 창단에 관한 두 후보의 입장과 지지 여부를 묻고, 답변을 700만 야구팬에게 공개할 예정이다. 만약 10구단 창단을 적극 지원하겠다는 후보가 있다면 야구계와 야구팬들의 힘을 모아 지지의사를 표명할 생각도 하고 있다”고 밝혔다. ‘지금껏 정치가 야구를 이용했다면 이젠 야구가 정치를 활용할 때’라는 게 박 총장의 생각이다. 만약 선수협이 야구발전과 10구단 창단에 적극적인 후보를 공개 지지한다면 실보단 득이 클 것이란 전망이다.
야구실행위원회 조용준 박사는 “특정 후보 공개 지지는 ‘여론 선도자’로서의 선수협 위상을 높이는 계기가 될 수 있다”며 “스포츠계를 외면했던 정치권의 이목을 단번에 잡을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고 평했다.
미국과 일본에서 스포츠협회가 특정 후보를 공개 지지하는 건 흔한 일이다. 권익단체로서 당연한 역할이라고 본다. 하지만, 국내 스포츠계는 몇몇 유명 체육인사가 개인적 차원에서 특정 후보를 지지한 게 전부였다.
조 박사는 “선수협의 정치권 압박이 한국 스포츠계의 협상력을 높이는 중요한 시험대가 될 수 있다”며 “700만 야구팬의 충성도와 결속력을 고려할 때 정치권이 10구단 창단 지원을 적극 후원할 가능성이 크다”고 전망했다.
선수협은 12월 6일 정기총회를 열어 선수들의 의견을 종합할 참이다. 박 총장은 “선수 대부분이 선수협의 단체행동을 이해하고, 따라줄 것으로 예상한다”며 “9개 구단 선수들의 결속력이 강해 단체행동에 나서도 균열이 생기는 일은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선수협은 발언력 강화 차원에서 ‘노동조합’ 전환을 고려 중이다. ‘노조’에 거부감을 나타내던 선수들도 10구단 창단이 계속 유보되자 ‘선수협의 선수노조 전환’을 적극 지지하고 있다는 후문이다.
박동희 스포츠춘추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