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무현 정부와 이명박 정부의 인수위 인사들은 대부분 정권 출범 후 공직에 진출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
▲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YS의 14대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이하 인수위)는 ‘대통령직인수위원회설치령’에 의거해 만들어진 국내 최초의 인수위다. 당시만 해도 인수위 인사들은 100% 정치인 일색이었다. 전문성보다는 차기 정부의 홍보에 몰두하는 일종의 홍보기구에 불과했다.
하지만 인수위에 포함된 인사 면면은 YS 측근 일색이었다. 이들 중 상당수는 차기 정부에 그대로 편승했다. 정원식 당시 인수위원장을 포함해 15명의 인수위 인사 중 모두 7명이 차기 정부 공직에 임명됐다. 박관용 당시 의원은 YS정부 청와대 비서실장에 임명됐으며 이해구, 이민섭, 남재희, 김한규 의원은 각각 내무부, 문화체육부, 노동부, 총무처 장관으로 내각에 입성했다. 그 밖에도 원외 인사였던 최창윤 총재 비서실장과 유경현 민자당 도지부장은 인수위를 발판으로 각각 총무처 차관과 헌법기관이자 대통령 직속 자문기구인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사무총장에 임명되기도 했다. 인수위의 ‘회전문 인사’는 인수위 시초였던 YS시절부터 사실상 시작됐다고 볼 수 있다. (표1 참조)
DJP연합을 근간으로 했던 DJ의 15대 인수위는 DJ계 인사와 JP계 인사가 혼합된 조직이었다. 당시 인수위 내부에는 김현욱, 이동복(이상 통일외교안보), 이건개(정무), 조부영(경제), 최재욱, 김종학(이상 사회문화), 함석재, 이양희(이상 정책) 등 JP 측 자민련 인사가 존재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얘기겠지만, 당시 인수위 인사 중 공직에 진출했던 인사 상당수는 DJ계 인사였다. 얼마 안 가 DJP연합 자체가 무너졌던 터라 자민련 인사 중 공직에 임명됐던 인사는 환경부 장관에 오른 최재욱 당시 자민련 총재 비서실장이 유일했다.
당시 인수위 수장이었던 이종찬 위원장은 1998년부터 2년간 국정원장을 지냈으며 김정길 당시 국민회의 부총재, 박태영 당시 국민회의 당무위원이 각각 행정자치부 장관과 산업자원부 장관을 지냈다. DJ 최측근이자 당대 실세였던 박지원 의원은 문화관광부 장관과 청와대 공보수석을 지냈다. 인수위에 참여했던 동교동계 3세대 선두주자 김한길 의원은 2000년 9월부터 박지원 의원의 바통을 이어받아 문화관광부 장관을 맡은 바 있다. 그 밖에도 이해찬 의원이 DJ정부 초창기 교육부 장관을 맡았다. 당시 26명이었던 인수위 인사 중 모두 12명이 내각, 청와대, 정부 직속 자문기구 등 공직에 임명됐다. (표2 참조)
회전문 인사의 심각성이 가장 잘 드러난 인수위는 단연 노무현 전 대통령의 16대 인수위다. 일명 ‘코드 인사’의 결정판이었다. 28명의 인수위 인사 중 모두 27명이 다양한 형태로 차기 정부 공직에 참여했다. 인수위 인사 대부분이 공직에 참여했다는 뜻이다. 여기에는 인수위 활동을 발판으로 의회에 입성한 이은영 외대 교수, 김영대 당시 개혁당 사무총장 등도 포함된다. 16대 인수위에는 기존 정치인들 외에 노 전 대통령 후보시절 브레인 역할을 해오던 학계 교수들이 대거 참여했는데 이들 교수가 공직에 대거 가담했다.
심지어 몇몇 인사들은 노무현 정부시절 수개의 공직을 거치기도 했다. 노 전 대통령의 후보시절 정책자문단장으로 정치판에 발을 들여 놓은 김병준 국민대 교수는 인수위를 거쳐 지방분권위원회 위원장, 정책기획위원회 위원장, 청와대 정책실장과 교육인적자원부 부총리까지 역임했다. 이정우 경북대 교수는 앞서의 김병준 교수와 번갈아가며 청와대 정책실장, 정책기획위원회 위원장과 대통령 정책특보를 지냈다. 이병완 당시 민주당 부의장 역시 인수위 기획조정분과를 거쳐 홍보수석으로 청와대에 입성, 청와대 홍보문화특보, 청와대 비서실장을 역임했다. 말 그대로 인수위 인사들이 돌고 도는 ‘회전문 인사’의 결정판을 보여준 셈이었다. (표3 참조)
현 정부인 이명박 대통령의 17대 인수위 역시 만만치 않은 ‘회전문 잔치판’이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코드 인사’의 결정판이었다면 이 대통령의 인사는 ‘고소영(고려대, 소망교회, 영남출신)’ 판이었다. 인수위 안에는 이경숙 위원장, 강만수 경제 분과 위원, 곽승준 고려대 교수 등 이 대통령이 다니는 소망교회 교인들이 대거 입성하는 기이한 일까지 있었다. 26명의 인수위 인사 중 24명이 각종 공직에 입성했다. (표4 참조)
한병관 기자 wlimodu@ilyo.co.kr
‘중심 추’ 적임자
역대 인수위를 살펴보면 인수위 내 부위원장이 실제 중심 추 역할을 해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가장 가까운 이명박 대통령의 17대 인수위의 경우, 김형오 전 국회의장이 교수 출신이었던 이경숙 전 인수위원장 밑에서 부위원장 임무를 수행했다. 당시 김 전 의장은 이 전 위원장을 대신해 당 내부인사들을 통솔하며 원내 창구 역할을 톡톡히 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16대 인수위에서는 김진표 의원이 인수위 부위원장직을 수행했다. 행정관료 출신으로 DJ시절 재정경제부 차관과 청와대 정책기획수석을 역임했던 김 의원은 인수위 내에서 실무적 역할을 총괄했다. 초창기였던 YS의 14대 인수위에서는 ‘부위원장직’ 자체가 없었지만, 박관용 당시 의원이 교수출신이자 전 정권 국무총리였던 정원식 인수위원장을 보좌하며 중심 추 역할을 했다.
역대 ‘부위원장직’을 맡았던 인물들의 공통점을 살펴보면, 모두 대통령 당선인의 핵심 측근으로 분류되기보다는 방계 인사이면서 경험과 실무능력이 뛰어난 인물들이라는 점이다.
진영 부위원장 역시 이러한 역대 부위원장들과 일맥상통한다. 진 부위원장의 경우, 친박계로 분류되긴 하지만 엄밀히 따지면 ‘복박’(한때 친박계 진영을 떠났다가 다시금 진영에 합류한 인사) 인사에 가깝다. 진 부위원장은 지난 2004년,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새누리당 전신) 당 대표의 비서실장으로 친박 라인에 합류했지만 언제나 ‘중심’에 들지는 못했다.
하지만 진 부위원장의 실무적 능력에 대해서는 박 당선인도 깊은 신뢰를 갖고 있다. 박 당선인이 급한 일이 있을 때면,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하여 귀를 기울였던 이가 바로 진 부위원장이었다. 외국 정상과의 면담 등 중요한 자리에서도 진 부위원장을 배석시키는 일이 많았다. 진 부위원장은 3선이라는 관록과 원내 각종 위원회를 두루 거친 실무 경험, 여기에 호남인사(전북 고창)라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받은 것으로 보인다.
한병관 기자 wlimodu@ilyo.co.kr
각종 논란으로 공직 낙마 후 재입성 비일비재
이 대통령의 17대 인수위 인사들 상당수는 공직 입성 전후로 각종 논란에 시달리다 낙마하는 경우가 꽤 많았다. 하지만 상당수는 얼마 안 가 다른 공직에 입성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내심 공직 입성을 기대했지만 ‘아륀지 발언 논란’으로 정부 초기 공직 입성에 실패했던 이경숙 당시 위원장은 2009년부터 한국장학재단 이사장으로 재직 중이다. 통일부 장관에 내정됐지만, 부동산 투기 논란으로 중도 사퇴한 남주홍 당시 경기대 교수는 훗날 국정원 특보, 외교통상부 국제안보대사, 캐나다 대사를 거쳐 현재 국정원 차장에 재직 중이다. MB노믹스의 실질적 창시자로 여러 논란을 부른 강만수 당시 인수위원은 줄곧 사퇴를 거부하며 기획재정부 장관, 국가경쟁력강화위원회 위원장, 청와대 경제특보 등 요직을 두루 거치다 현재 산업은행장 겸 산은금융그룹 회장이 됐다. 쌀 직불금 부당수령 논란으로 보건복지부에서 쫓겨나다시피 한 이봉화 전 차관은 현재 보건복지부 산하 한국보건복지정보개발원 초대 원장으로 슬그머니 임명됐다. 이처럼 이 대통령은 임기 내내 용서에 용서를 거듭하며 ‘전과자 회전문 인사’의 극치를 보여줬다.
한병관 기자 wlimodu@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