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대제철은 충남 당진에 일관제철소를 짓고 있다. | ||
안 그래도 뜨거운 철강업계 내에서 최근 발생한 고소 사건은 업계의 관심을 집중시킬 것으로 보인다. 고소인은 포스코, 피고소인은 포스코 출신으로 현재 현대제철에 재직 중인 인사들이다. 포스코를 축으로 한 철강업계의 신경전이 가열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셈이다.
광주지방검찰청 순천지청은 현재 포스코가 고발한 현대제철 직원 두 명에 대한 조사를 진행 중이다. 이들은 모두 포스코 출신으로 ‘사내 기밀문서(고로기술 관련 추정)를 유출해 현대제철로 가져갔다’고 포스코가 이들 두 사람을 고소하면서 검찰 조사가 진행돼 온 것이다. 검찰 측은 “현재 조사가 진행 중이며 아직까지 특별한 혐의가 드러난 바는 없다”고만 밝혔다.
포스코 측은 “현대제철 회사 차원이 아닌 포스코 출신 직원들 개인에 대한 고소”라고 못 박지만 수사당국에선 현대제철 사업장에 대한 조사까지 벌인 것으로 알려진다. 자칫 포스코와 현대제철 간의 회사 간 대립양상으로 치닫게 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것이다. 국내 고로 관련 기술자들이 포스코 출신밖에 없다는 점 때문에 현대제철이 포스코 퇴직인사들을 대거 영입해온 것이 이번 고소 건의 단초가 된 셈이다.
포스코가 자사 출신 현대제철 직원들을 고소한 일은 다수 철강업계 인사들마저 알지 못할 정도로 ‘쉬쉬’하며 이뤄진 일이다. 만약 포스코 측의 고소 사유대로 포스코의 기밀이 유출된 것이라면 피고소인 개인에 대한 형사처벌이 불가피하다. 부수적으로 포스코의 피해보상을 요구하는 민사소송 제기도 가능할 것이다.
이럴 경우 현대제철은 법적 도덕적으로 큰 타격을 입을 것이다. 두산-STX 사건에서 보듯 그 파장은 그룹 전체에 미칠 수 있다. 철광석에서 자동차까지 ‘수직계열화’를 꿈꾸며 일관제철소 건설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정몽구 회장까지 상처를 입는 셈이다. 이는 포스코 출신을 영입한 다른 철강업체들도 마찬가지가 될 것이다. 그러나 검찰 수사결과 ‘혐의 없음’으로 결론 날 경우 포스코는 업계 맏형으로서 후발주자의 행보에 ‘태클’을 걸었다는 비아냥거림을 감수해야 한다.
철강업계 일각에서는 최근 업계 상황을 들며 ‘제왕’으로 군림해온 포스코가 후발업체들의 발목을 잡아 끌 가능성이 없지 않다고 관측한다. 현대차그룹의 현대제철은 자동차용 철강재 자체 수급을 목표로 충남 당진에 일관제철소를 짓고 있다. 지난 11월 16일엔 동부제강이 일관제철소를 착공했으며 11월 21일엔 동국제강이 한국과 브라질을 잇는 일관제철소 건립 계획을 발표했다.
현대제철의 일관제철 시설이 완공돼 현대·기아차 생산 자동차 철강재를 자체 수급하게 될 경우 포스코는 큰 고객을 하나 잃게 된다. 포스코로부터 원료인 핫코일을 공급받아 냉연 강판을 제작·판매해온 동부제강의 재료 수급 자체 해결과 동국제강의 원자재 자체 조달 역시 포스코 수입 감소로 이어질 전망이다.
현재 국내 철강업체들은 제왕으로 군림해온 포스코의 눈치를 살필 수밖에 없는 처지다. 포스코가 원자재를 공급해야 이를 토대로 제품 제작·판매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제철 동부제강 동국제강 등이 과감히 원자재 자체 수급 계획에 나선 것은 장기적 안목 때문으로 알려진다. 냉연강판의 경우 철강업체들은 그 원료인 핫코일을 포스코로부터 공급받아 만들어 판매하는데 포스코 역시 냉연강판을 직접 제작 판매한다. 포스코가 원자재 공급량을 줄이거나 냉연강판 가격을 동결할 경우 다른 업체들은 피해를 감수해야 한다.
이렇다보니 일부에서는 중국으로부터 원자재를 수입하는 경우가 발생하는데 중국산은 포스코 제품에 비해 질이 떨어지면서 가격은 더 비싸다. 그럼에도 물건을 만들어 팔아야 하기에 ‘울며 겨자 먹기’식으로 중국산을 수입한다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포스코의 눈치를 살펴야 하는 입장이면서도 막대한 자금을 쏟아 부으며 원자재 자급조달을 위한 시설을 구축하려는 것이다.
현대제철과 동부제강 동국제강 등이 최근 철강업에 쏟는 열정이 그 어느 때보다 뜨겁다는 점 또한 포스코를 편치 않게 만들 대목으로 보인다.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은 수시로 당진 제철소 현장을 찾을 정도로 남다른 기대감을 표현해왔다. 현대차 비자금 사건 재판과 여수 세계박람회 유치 활동으로 눈코 뜰 새 없는 와중에도 철강업에 대한 애정만큼은 식을 줄 몰랐던 것이다.
동부제강 제철소 기공식장엔 김준기 동부그룹 회장을 비롯한 그룹 수뇌부가 총출동해 눈길을 끌었다. 얼마 전 김 회장 아들 김남호 씨가 동부CNI 최대주주로 올라서면서 동부CNI→동부정밀→동부제강으로 이어지는 출자형태가 그룹 지배구조 근간으로 떠올랐다. 동국제강이 브라질에 짓는 일관제철소에서 쏟아질 쇳물 또한 그룹의 신성장 동력이 될 것으로 여겨진다.
각자 거는 기대가 남다르다 보니 철강업체들 간 인력 빼가기 경쟁 역시 뜨거운 쇳물만큼이나 달아오른 상태다. 현대제철은 이미 포스코 퇴직 인력 수십 명을 데려왔고 동부제강 역시 주요 임원진을 포스코와 현대제철 출신으로 채워놓았다. 결국 기밀 유출 논란은 언제든 벌어질 수 있는 ‘시한폭탄’인 셈이었다.
익명을 요구한 철강업계 관계자는 이번 포스코의 고소 사건에 대해 “포스코와의 공생관계에서 경쟁구도로 관계를 재편하려는 현대제철에 대한 포스코의 견제가 깔려있을 것”이라며 “다른 업체들이 포스코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면 만들수록 포스코의 대응 또한 거세질 것”이라고 예측했다. 포스코의 고소가 ‘견제구’가 될지 ‘에러’가 될지 두고 볼 일이다.
천우진 기자 wjch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