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4월 청와대에서 노무현 대통령(왼쪽)과 김대중 전 대통령이 대화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 ||
지난 8월15일 최측근 인사였던 권노갑 전 민주당 상임고문이 구속되었지만, 김대중 전 대통령이 머물고 있는 동교동에는 분노인지 침묵인지 알 수 없는 깊은 정적만이 흐르고 있다. 측근들은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는 말만 하고 있다. 권씨는 대북 사업과 관련해 편의를 봐주는 대가로 2000년 초 현대그룹으로부터 2백억원을 받은 혐의를 받고 있다.
문제는 권씨가 지난 2000년 4월에 있었던 16대 총선을 실질적으로 지휘한 사람이라는 데 있다. 그는 자신이 현대측으로부터 돈을 받았다는 사실은 부인했지만 당시 1백10억원을 조달했고, 당에 35억원을 연결시켜주었다고 말해 총선 때 거액을 사용했다는 것을 시인한 상태다.
만약 검찰이 권씨가 조성한 자금의 사용처를 세밀히 밝히려 한다면 ‘동교동’으로 여파가 미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다. 이럴 경우 김 전 대통령이 이런 사실을 알고 있었는지가 쟁점이 되면서 일거에 동교동은 태풍의 눈이 될 것이다.
동교동계 한 의원은 “만약 수사가 어떤 식이든 김 전 대통령 쪽으로 흘러갈 경우 호남 민심의 향방은 예측하기 힘들 것이다”라고 강조했다. 이 시나리오가 현실화하면 흔한 말로 ‘민란’이 일어날 정도로 걷잡을 수 없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이런 계산 때문인지 권씨측에서도 체포된 뒤 김 전 대통령을 방패로 삼으려 한 흔적이 엿보인다. 비록 나중에 말을 뒤집기는 했지만, 권씨와 가까운 민주당 이훈평 의원이 “당시 권 전 고문은 현대측에서 돈을 준비했다고 김 전 대통령에게 보고했으나, 김 전 대통령이 받지 말라고 해서 받지 않았다”고 말한 것이나, 민주당 김태랑 최고위원이 “2000년 총선 당시 권 전 고문이 김 전 대통령에게 직보하는 것을 들었다”고 공개한 것이 그런 흔적들이다.
정가에는 16대 총선을 치를 때 민주당의 최고 지휘자는 김 전 대통령이었다는 말이 널리 퍼져 있다. 김 전 대통령이 당시 민주당 상임고문을 맡고 있던 권씨를 지렛대로 해 공천과 선거 전반에 깊숙이 관여했다는 것이다.
이런 관측을 뒷받침하듯 권씨 또한 올 초 한 월간지와의 인터뷰에서 “1999년과 2000년에는 한 달에 한 번꼴로 청와대에 들어가 (김대중 전 대통령과) 당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다”고 말한 적이 있다. 당시 사무총장이 동교동계인 김옥두 의원이었고, 정균환·최재승 의원 등 동교동계 의원들이 1차 공천 작업을 주도했다는 것도 눈여겨볼 만한 대목이다. 한마디로 16대 총선은 동교동계가 총대를 메고 모든 것을 주도한 선거였던 것.
현재대로라면 동교동의 ‘고민’은 더욱 깊어질 듯하다. ‘여의도’로 향하던 검찰의 칼날이 다시 동교동쪽으로 드리워질 조짐을 보이기 때문이다. 최근 검찰은 ‘권씨가 현대로부터 받은 돈의 사용처에 대해서는 수사하지 않겠다’는 이전 방침을 바꿔 ‘권씨 돈의 수혜자들에 대해 조사를 하겠다’고 밝혔다. 권씨가 혐의를 전면 부인하고 있어 사용처에 대한 조사가 불가피하다는 논리다.
▲ 지난 15일 구속되는 권노갑씨.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
이 가운데 가장 폭발력이 큰 것은 노 대통령 부분이다. 권씨는 올해 초 “16대 총선 당시 당에 들어오는 후원금을 서울과 경기지역 출마자들에게 우선적으로 배분했다. 다음 순위는 경상도 쪽이었다. 호남 쪽은 10원도 안 줬다”라고 밝힌 적이 있다.
16대 총선 때 경상도 쪽에서 가장 주목을 받았던 후보는 대구·경북 지역에서는 김중권 후보, 부산·경남 쪽에서는 노무현 후보였다. 당시 두 사람은 거의 당선권에 들 정도로 선전했으나, 마지막 문턱을 넘지 못했다. 정치권에는 이미 노 대통령이 당시 얼마를 받았다는 식의 확인되지 않은 소문까지 돌고 있다.
지난해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 과정에서 이인제 후보측이 주장한 “노무현 후보가 16대 총선 때 한도 원도 없이 돈을 써보았다고 했다”라는 말도 이번에 다시 도마에 올랐다.
하지만 동교동 사람들로서는 현대의 정치자금과 권씨, 그리고 김 전 대통령 사이의 ‘삼각함수’가 훨씬 더 부담스러운 대목이다. 현대 자금에 대한 김 전 대통령의 인지 여부가 다시 논란거리로 등장할 가능성이 있는 데다 자금 집행과정 및 용처에 대한 조사에서 동교동계 쪽으로 ‘엉뚱한’ 불똥이 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검찰 주변에선 권씨 자금 사용처에 대한 조사가 이번 사건의 본질이 아니기 때문에 결코 ‘일정 수위’를 넘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 하지만 검찰이 권씨 사건과 관련해 민감한 사안을 피해간다고 하더라도 동교동의 ‘시련’이 끝났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총선을 앞두고 언제든 또 다른 사건이 동교동을 휘감아올 수도 있는 상황이다.
이와 관련해 정가에서는 최근 대검 중수부가 동교동계 출신 한 단체장을 내사하고 있는 사실에 주목한다. 이 사안에는 이 단체장 말고, 다른 동교동계 인사들도 연루되었다는 관측이 불거지고 있기 때문이다. 동교동으로서는 어디에서, 어떤 사건이 튀어나올지 알 수 없는 국면인 것. DJ로서는 어쩌면 침묵만이 능사가 아닌 시기를 맞고 있는지도 모른다.
민영서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