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측의 갈등은 몇 년 전부터 시작했다. 중심엔 초상사용권이 있었다. 2010년 4월 14일 프로야구인들의 모임인 일구회는 각 언론사에 인터넷 야구게임 ‘슬러거’ 운영사인 네오위즈게임즈를 상대로 법원에 10억 원 규모의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제기했다는 내용의 보도자료를 배포했다.
일구회는 보도자료에서 “네오위즈에 전직 야구선수들의 성명 등을 무단으로 사용한 것에 대해 사과 및 문제 해결을 위한 협의를 수차례 촉구했으나, 네오위즈가 시종일관 불성실한 자세로 일관하는데다 은퇴선수들의 권리를 계속 침해해 부득이 소송을 제기했다”고 밝혔다.
야구계는 게임사가 전직 선수들의 초상사용권을 함부로 사용한 것에 분노를 나타내면서도 ‘일구회가 무슨 대표성으로 소송을 제기했는지 모르겠다’고 고개를 갸웃했다.
그도 그럴 게 1991년 발족한 일구회는 당시만 해도 전직 프로야구 감독들의 배타적 친목모임에 불과했다. 1990년대 중반 전직 코치, 선수, 프런트, 해설가, 캐스터들에게 문호를 개방하며 외형을 확장시켰지만, 여전히 친목회 수준이었다
그러던 2010년 1월 27일 일구회는 갑자기 사단법인으로 출범하며 자신들을 ‘전직 프로야구선수들의 대표 단체’로 표방하기 시작했다. 일구회 산하에 은퇴선수협의회를 만든 것도 그 때문이었다. 전·현직 감독을 포함해 250여 명에 불과했던 회원 수는 사단법인 발족과 함께 크게 늘었다.
당시 일구회 측은 “현역선수는 선수협에서 초상사용권을 관리하기에 게임사에서 함부로 현역선수들의 이름을 게임에 쓸 수 없다. 그러나 전직 선수들은 선수협 같은 조직이 없어 지금처럼 게임사가 임의로 사용해도 대항할 방법이 없다”며 “전직 선수들의 권리를 보호하려면 강력한 조직이 필요하다는 야구인들의 목소리를 반영해 일구회 산하에 은퇴선수협을 만들게 됐다”고 설명했다.
전직 야구선수들은 일구회로부터 “우리에게 위임장을 써주면 게임사로부터 초상사용권료를 받아주겠다”는 말을 듣고는 곧바로 일구회 회원으로 가입했다. 일구회는 전직 야구선수들의 수가 늘어나자 이들로부터 초상사용권 권한을 위임받아 게임사와 협상에 들어갔다.
하지만, 일구회와 불편한 관계를 유지하던 선수협이 정관을 개정하면서 판도가 달라졌다. 당시 선수협은 회비를 내야만 회원으로서의 자격이 유지되던 기존 정관을 개정해 회비를 내지 않는 은퇴선수도 계속 회원으로서의 권리를 유지하도록 했다. 한마디로 선수협이 전·현직 선수를 아우르는 대표기관이 되겠다는 뜻이었다.
선수협 관계자는 “현직 선수와 전직 선수가 단결해야 더 많은 권리를 보장받을 수 있다. 선수협 산하 은퇴선수협이 있는데 굳이 일구회에 초상사용권 권한을 위임할 필요가 있는지 모르겠다”며 사실상 복수 은퇴선수협 시대 개막을 알렸다.
전직 선수 유치전을 벌이던 두 은퇴선수협은 지난해 8월 선수협 권시형 사무총장이 구속되며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선수협 산하 은퇴선수협은 핵심 관계자들이 ‘권시형 스캔들’에 휘말리며 활동 폭이 좁아졌다. 반면 일구회 산하 은퇴선수협은 그 틈을 이용해 회원수를 늘렸다.
급기야 선수협 산하 은퇴선수협은 선수협을 나와 독자조직으로 남기로 결심한다. 선수협도 이때 은퇴선수협의 결정을 지지했다. 현직 선수들의 결사체인 선수협이 은퇴선수협까지 관리하는 건 옳지 않다는 게 이유였다.
그러던 중 지난 1월 일구회와 선수협에서 독립한 은퇴선수협이 통합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당시 일구회 관계자는 “일구회가 관리하던 초상사용권에 대한 모든 권리를 은퇴선수협에게 넘기기로 했다”며 “은퇴선수협 핵심 인사를 일구회 사무국장으로 영입해 전직 선수들의 초상사용권을 효과적으로 관리하도록 배려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지난해 5월 21일 ‘한일 프로야구 레전드 매치 개최’ 기자회견 모습. 왼쪽부터 이재환 일구회 회장, 장훈 일본 명구회 대표, 일구회 감독을 맡은 김인식 위원장. 연합뉴스
다른 야구인도 “일구회가 초상사용권 권리를 은퇴선수협에게 넘겨줬다고는 하지만, 은퇴선수협 상임이사이던 이 모 씨가 일구회 사무국장으로 들어갔다는 건 일구회가 은퇴선수협을 수렴청정하겠다는 뜻”이라며 “회원 의사를 묻지 않고 진행한 일방적 통합을 인정할 수 없다”고 목소릴 높였다.
통합을 반대하는 측은 일구회에 대한 불신이 상당하다. 한 전직 선수는 “일구회는 회장도 프로야구 선수 출신이 아니고, 부회장들도 하나같이 감독 출신이지 선수 출신은 아니다. 사무총장 역시 프런트 출신으로 은퇴선수들을 대변할 위치가 아니다”라며 “전직 선수들의 땀과 눈물이 서린 성과물을 전직 감독, 프런트 출신이 챙기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주장했다.
지난 3월 출범한 은선협은 이러한 시각을 함께하는 전직 선수들이 모인 조직체로 알려졌다. 은선협을 주도한 최익성은 “우리는 초상사용권으로 장사를 하려는 사람들이 아니다”라며 “은선협은 은퇴선수 교육이나 일자리 사업, 복지사업을 추진하기 위해 만든 순수은퇴선수 조직체”라고 설명했다.
최근 최익성은 일구회로부터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당했다. 최익성은 “은퇴선수협 동료 회원들에게 문자메시지로 통합의 절차적 부당성을 알린 게 어째서 명예훼손인지 모르겠다”며 “일구회 선배들은 과연 누가 야구계의 분란을 초래하는 어둠의 세력인지 곰곰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고 일갈했다.
박동희 스포츠춘추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