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야구선수들이 자신의 등번호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소중하게 생각한다. 그렇다면 선수들은 자신의 등번호를 어떻게 정할까.
자신의 이름에서 등번호를 가져온 선수도 있다. 삼성 장원삼의 경우는 자신의 이름에 원(one)과 삼(3)을 따서 13번을 달고 있다. 과거 롯데에서 3루수로 활약했던 공필성 롯데2군 코치는 자신의 성인 ‘공’의 음을 따서 간단하게 등번호를 0번으로 사용해 화제가 됐다. (현재도 0번은 SK의 외야수 김강민이 사용하고 있는데, 그가 0번을 사용하는 이유는 ‘특이해서’였다.)
자신이 평소 존경하던 선수를 따르는 마음에 등번호를 정하기도 한다. 2011년 세상을 떠난 고 장효조 전 삼성2군 감독은 1983년 삼성에 입단하면서 재일교포 전 일본프로야구 선수인 장훈의 번호인 10번을 원했다. 그러나 10번은 이미 선배 허규옥이 사용하고 있었다. 장효조는 허규옥에게 간곡히 부탁을 했고, 마침내 10번을 달고 뛸 수 있었다. 이후 삼성의 등번호 10번은 양준혁이 이어받았고, 2010년 양준혁이 선수 은퇴를 하면서 삼성의 10번은 장효조와 양준혁의 업적을 기리는 의미에서 영구결번으로 지정됐다.
국가대표급 유격수들 중에는 유독 7번을 달고 뛰는 선수들이 많다. 이는 MBC청룡의 프랜차이즈 스타 김재박 전 감독의 영향이 크다. 대한민국 최고의 유격수 중 한 명으로 꼽히는 김재박 전 감독의 현역시절 등번호를 이어받는 의미에서 사용하는 것이다. 1993년 이종범은 당시 해태에 입단하면서 등번호 7번을 받았다. 그는 “같은 유격수 포지션이며 우상이었던 김재박 감독의 등번호를 이어받은 만큼 더 잘해야겠다고 다짐했다”고 당시 심정을 기억했다. 프로 데뷔 후부터 현재까지 7번만을 고수하고 있는 박진만 역시 김 전 감독과의 인연 때문에 등번호를 사용하게 됐다. 박진만은 1996년 현대에 입단하면서부터 뛰어난 기량 덕분에 김재박 당시 현대 감독의 유격수 후계자라고 불리게 됐고, 자연스럽게 김 전 감독의 등번호를 물려받았다. 삼성에서도 박진만은 줄곧 7번을 사용했는데, 박진만이 SK로 이적한 이후 지금은 김상수가 삼성에서 7번을 이어받아 주전 유격수로 활약하고 있다.
왼쪽부터 박철순, 박찬호
개인 성적이 좋지 않을 때 등번호를 바꾸며 분위기 쇄신을 꾀하는 경우도 있다. 이승엽은 일본프로야구 요미우리로 이적하면서 삼성과 지바롯데에서 달았던 36번이 아닌 33번을 달고 뛰었다. 그러나 부상 등으로 인해 부진이 이어지자 2007년에 25번으로 등번호를 교체했다. 2006년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에 출전했을 당시 25번을 달고 5홈런을 치는 등 맹활약을 펼쳤던 그 때 그 기분을 이어보자는 의미에서였다.
두산의 내야수 오재원 역시 2010년 등번호를 7번에서 53번으로 바꿨다. 53번은 오재원이 야탑고 시절 사용했던 번호로, 당시 13명에 불과했던 야구부를 이끌고 봉황대기 8강에 진출한 기적을 기억하기 위한 변화였다. 그 영향 때문이었는지 오재원은 2011년 커리어하이를 기록했다. 하지만 오재원은 이번 시즌을 앞두고 신고 선수급인 97번으로 등번호를 다시 바꾸며 새로운 각오를 다졌다.
그러나 자신이 원하는 등번호를 사용하기 힘든 경우도 있다. 이적을 통해 새로운 팀에 왔는데 갖고 싶은 등번호를 이미 동료 선수가 사용하고 있다거나, 영구결번으로 지정돼 있을 때다. 영구결번은 어쩔 수 없지만, 다른 선수가 사용하고 있을 경우에는 선수들끼리 양해를 구해 번호를 바꾸기도 한다. 지난 6일 KIA에서 SK로 갑작스럽게 트레이드된 김상현은 KIA에서 등번호 27번을 사용하고 있었다. 2009년 MVP를 수상했을 때 사용했던 번호였던 것. 그런데 SK에서는 투수 백인식이 27번을 달았다. 그러나 백인식은 등번호를 바로 김상현에게 내줬다. 이에 김상현은 “백인식에게 미안하고 고맙다”며 “내가 밥 한 번 사야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등번호에 큰 의미를 두지 않고 정하는 선수들도 있다. 야구선수의 등번호 중 가장 유명한 숫자 중 하나는 박찬호의 ‘61번’이다.
박찬호와 등번호 61번의 인연은 그가 처음 메이저리그에 진출했을 때부터다. 1994년 LA다저스에 입단한 박찬호는 원래 한양대 시절 달았던 16번을 원했다. 그러나 당시 LA다저스의 론 페로나스키 투수코치가 16번을 쓰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어쩔 수 없이 16을 뒤집은 61을 달고 뛰어야 했다(그러나 공교롭게도 이듬해 페로나스키 코치는 샌프란시스코로 떠났고, 박찬호가 원했던 16번은 새로 입단한 일본인 투수 노모 히데오가 차지했다). 이후 박찬호는 텍사스, 샌디에이고, 뉴욕 메츠, 필라델피아, 뉴욕 양키스, 피츠버그 등에서 뛰면서도 61번이 적힌 유니폼을 입었고, 국내 프로야구에 복귀해 한화에서 선수생활을 은퇴하는 순간까지 등번호 61번을 고수했다.
민웅기 기자 minwg08@ilyo.co.kr
주인 없는 번호 ‘콕’… 되레 팬들이 의미 부여
민웅기 기자 minwg08@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