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부터 이창호 9단, 변상일 2단
나현 이동훈 변상일 신민준 신진서. 천재소년 5형제다. 곧 독수리 5형제가 될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런데 최근 동향을 보면, 나현은 체력이 달리는 것 같고, 이동훈은 슬럼프라고 하기는 그렇지만 좀 조용하다. 변상일 신민준 신진서 중에서는 신진서를 주목하는 사람이 많은 것 같은데, 그건 더 두고 볼 일이고, 현재는 다 비슷하다. 아주 최근, 요 며칠 사이에는 변상일이 돋보였으니까.
이창호 9단의 팬들은 변상일(15)에게 관심이 많다. 분위기가 비슷하다고 한다. 체격도 그렇고 바둑 두는 자세도 그렇고, 변상일을 보면 이 9단의 어릴 때를 보는 것 같다고 한다. 흔히 하는 얘기대로 우리 바둑계에는 전통 중에는 ‘제일인자 계보의 법칙(?^^)’이란 것도 있다. 조남철 선생 → 김인 국수 → 조훈현 9단 → 이창호 9단 → 이세돌 9단, 조남철 선생에서 시작해 이세돌 9단에 이르는 족보에 따른다면, 확률상 다음은 변상일일지 모른다는 것.
조남철 선생과 조훈현 9단과 이세돌 9단은 허리띠의 구멍을 더 낼 수 없을 정도로 호리호리해 바지가 항상 헐렁한 스타일. 기풍을 실리와 세력, 빠름과 두터움으로 대별할 때, 빠름과 실리 쪽이다. 김인 국수와 이창호 9단은 외모도 바둑도 ‘두터운’ 스타일. 계보는 한 번은 실리, 한 번은 두터움, 그렇게 이어져왔는데, 이세돌 다음은 두터움이어서, 거기서 후보를 찾으니 변상일이라는 것. 세상은 그런 게 맞아떨어지는 곳이다. 우연처럼 보이는 필연, 필연처럼 보이는 우연.
여기까지는 엊그제 두터움 선호파들이 이창호 9단과 변상일 2단이 둔, 두 판의 바둑을 비교하면서 주고받은 얘기다. 전적은 1승1패. 변상일이 먼저 지난해 6월 ‘2012 올레배’ 본선 2회전에서 이 9단을 만나 흑을 들고 277수 만에 2집반을 이겨 잠시 화제의 주인공이 되었다. 그날 바둑은 중반 넘어까지 엇비슷한 형세에서 이 9단이 약간 리드하고 있었다. 변상일은 우하귀 쪽 이 9단의 백 대마를 잠깐 쳐다보더니 한두 수 응수타진을 날렸다. 그리고 다시 다른 곳에서 50여 수 공방을 하고는 아까 그 백 대마로 돌아와, 10집쯤 내고 살아 있는 것 같았던 대마 속으로 들어가 빅을 만들어 버렸다. 큰 차이가 아니었던 바둑은 거기서 뒤집어졌다.
응수타진만 날리고 즉시 결행하지 않은 것은, 물론 그때는 거길 빅으로 만들어도 여전히 부족하다는 생각에서였으리라. 다른 곳에서 더 추격해 놓고 이제는 된 것 같다고 여겨졌을 때 결행한 것이리라. 당연한 전략. 그러나 그 인내와 시쳇말로 ‘꿍심’이 팬들을 즐겁게 했다. 이창호도 어릴 때 한없는 기다림과 반집이라도 유리하면 물러서고, 잡을 수 있는 말도 잡으러 가지 않는 놀라운 ‘꿍심’으로 세계를 경악시켰으니까.
이 9단과 변상일은 1년 만인 올해 5월 5일 어린이날, 바둑TV 스튜디오에서 다시 만났다. 한국리그에서였다. 이 9단은 넷마블팀, 변상일은 SK에너지팀. 지난해 대국 때 백을 들었던 이 9단이 이번에도 백을 들고 ‘이번에는’ 166수 만에 불계승을 거두었다. 이 9단의 실리와 변상일의 대세력이 겨룬 바둑이었다. 변상일의 대세력은 지난날 세계 바둑팬들을 열광시켰던 다케미야 9단의 우주류를 방불케 했는데, 이 9단은 중반 막바지부터 실로 정교한 수읽기로 중앙을 궤멸시켰다. 폭파전문가 조치훈 9단의 솜씨를 보는 것 같았다.
<4도>는 얼마 전 대국의 초반. <1도>와 비슷하다. 이 9단은 똑같은 상황으로 만들어 가르쳐 주겠다는 뜻이었을까. 변상일은 “대국수님이지만, 바둑판 위에서는 외람되지만, 당당하게 가르침을 받겠습니다”라는 뜻이었을까. <5도>는 종반 입구의 모습. 우하귀 백 대마는 ‘완벽하게(^^)’ 살아 있다. 대신 중앙이 무량대궐이다.
<6도> 백1부터 폭파작업이 시작된다. 하변에서 백1 찌르고, 3으로 물어보고, 우상귀로 돌아가 백5~흑8로 시간을 벌고, 하변으로 돌아와 백9 끊고…. 백11로 한 칸 뛰고, 13으로 몰고, 위로 올라가 15로 또 한 칸 뛰어 19까지. 다시 아래로 내려와 백21로 잇고 흑22에는 백23으로 막았다. 여기서 변상일이 돌을 거두었다. 중앙이 다 무너졌으니 도리가 없었다. 백15 때….
<7도> 흑1, 3으로 뚫고 끊으면? 역시 아래 쪽 백4로 돌아와 잇는다. 흑은 중앙을 지키려면 5-7로 끊어야 하는데, 백은 8부터 16까지 축으로 몰아가고, 흑17 때 백18로 길을 묻는다. 이게 묘수. 흑19로 A에 따내면 다시 백B, 흑C, 백D, 흑E까지 축으로 몰고, 손을 돌려 백F로 단수치는 것. 흑▲ 두 점이 떨어진다. 흑19로 C면 물론 백G.
<6도> 백23 다음 <8도> 흑1로 끊으면? 백2-4에서 6으로 지키는 수가 있다. 7과 8 자리가 맞보기. 수읽기의 놀라움, 수순의 즐거움이여! 좌우간 변상일, 그리고 신민준, 두터운 두 소년을 지켜보자. 대통의 계보를 제대로 잇는지, 어쩌는지.
이광구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