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일 김지석(왼쪽)이 박정환과 대국하는 모습.
1등이 수시로 바뀌면 랭킹 발표가 재미있어진다. 랭킹 자체에 별다른 혜택이 없는 한, 1등은 늘 그대로인 채 나머지 순위가 바뀌는 것은, 대개는 관심 밖이다. 작년인가 재작년에 이창호 9단이 처음으로 10위권 밖으로 밀려났을 때, 한동안 화제가 되었다. 랭킹에 대한 일반의 관심과 흥미는 그런 정도다.
그런데 이런 경우는 좀 다른 것도 같다. 바둑 기록에 밝은 마니아들 사이에서 잔잔한 화제가 되고 있다. 현재는 1등이 이세돌, 2등은 김지석, 3등은 박정환…인데, 김지석이 박정환을 넘어 2등에 올라와 있는 것이 눈에 띈다는 것. 2, 3위 다툼이 주목된다는 것.
2, 3위 다툼은 새로울 게 없다. 그러나 김지석과 박정환의 다툼이라면 다르다. 박정환은 얼마 전에는 이세돌까지 제치고 1등을 했었다. 재위기간이 너무 짧긴 했지만, 1등은 1등이었다.
박정환은 그동안 외로웠다. 사람들은 틈만 나면 ‘이세돌 다음’을 찾는다. 한-중 경쟁이 치열해지고, 자칫 추월당할지도 모른다는 분위기가 조성되면서 더욱 그렇다.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거론되는 이름은 많다. 그러나 딱 떨어지게 누구다 하는 후보는 드물다. 몇 년 전부터 지금까지는 박정환이 유일하다.
김지석은 최근에 5번기의 타이틀 매치에서 이세돌에게 3 대 0 완봉승을 거두었다. 입단 때부터 강했지만, 이제 일가를 이루었다는 평가를 받기 시작했다. 그런 김지석이 비록 타이틀과는 무관한 랭킹에서지만, 박정환을 제쳤으니 고무적이라는 얘기다. 그 말에는 김지석과 박정환의 각축이 치열해질수록 상승작용이 일어날 것이고, 그 여파가 세대교체, 패자교대(覇者交代)의 시기를 앞당길 수 있다는 기대가 담겨 있다.
김지석
그런 의미에서 5월 20일 한국기원 1층 바둑TV 스튜디오에서 벌어진 제9기 한국물가정보배 본선, 김지석 대 박정환의 한 판에 비상한 관심이 쏠렸다. 김지석이 랭킹에서 앞서고 나서의 첫 대국. 김지석이 백을 들었다. 두 사람은 모두 엄청난 수읽기를 바탕으로 난타전을 즐기는 역전형(力戰型)이어서 바둑은 처음부터 눈 돌릴 틈 없는 육박전의 연속이었다. 흥미진진했고, 백이 흑을 잘 몰아쳤다.
심기일전의 계기라는 게 있는 법. 김지석이 이세돌을 꺾고 타이틀을 차지한 것이 본인에게는 분명 심기일전의 계기가 되었을 것이고, 심기일전하면 모습도 새로워지는 것. 박정환만 만나면 지는 예전의 김지석이 아닌 것 같았다.
그러다가 두 번의 궤도이탈이 있었다. 첫 번째는 정말 무엇에 홀리기라도 한 것 같았다. 두 번째는 수읽기의 부족이었다. 수읽기를 능기로 하는 김지석이 수읽기에서 포인트를 빼먹다니. 바둑은 김지석의 역전패였다. 김지석은 이번에도 사슬을 끊지 못했다.
그러나 관전석에서는 “김지석은 마지막 통과의례를 치르고 있다. 졌지만 예전과는 다른 모습이다. 김지석은 조만간 박정환과 적어도 대등한 승부는 펼치게 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았다. 김지석은 누구에게나 호감을 사는 인상. 그것도 큰 장점이다.
박정환은 스무 살, 김지석은 스물네 살. 나현 이동훈 변상일 신민준 신진서, 독수리 5형제가 치고 올라오기 전에 두 사람이 저만큼 앞서 가 있기를 기대한다. 한국물가정보배는 제한시간 각 10분에 40초 초읽기 3회. 이래서 속기는 그다지 마음에 들지가 않는다. 우승상금 3000만 원, 준우승은 1000만 원.
이광구 객원기자
5월 20일 한국물가정보배
백B로 잡는 것도 크다. 자체로 25집은 되며, 흑C 같은 게 사라져 그 주변 백돌들이 깨끗해지니 버꿔치기 자체로는 손해가 아니다. 그러나 김지석은….
<2도> 흑1로 잡을 때 하변 흑을 잡지 않고 백2로 따냈다. 하변보다는 중앙 흑 전체를 통 크게 공격하겠다는 것. <1도>의 백4는 하변 흑을 잡자는 것이 아니라, <2도> 흑1 때 손을 뺄 수 있게 하변 백을 미리 살아 놓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흑7은 못 본 것일까. 백8 때 흑9로 잇는 수가 있다는 것을 착각한 것일까. 어쨌거나 이런 식으로 양쪽이 떨어져서는 얘기가 안 되는 것.
<3도> 한 가지 희망이 남아 있었다. 백1, 3으로 끊어 이쪽 흑을 잡으러 가는 것. 잡으면 다시 이제부터다. 흑8은 타개의 실마리를 모색하는 수였는데, 결과적으로 승착이 되었다. 이 말은 당연한 응수 같았던 백9가 패착이었다는 것.
<4도> 흑1로 건너붙이자, 김지석도 여기서는 사태를 파악하고 백2로 손을 돌렸고, 흑은 5-7 때 따내며 살아갔다. 이래서는 끝이었다. 흑5 때…
<5도> 백1로 이으면? 흑2 다음 다행히 4로 단수치고 6으로 젖혀 막는 수가 있다. 백7, 9면? 흑8, 10 다음 백A는 흑B로 회돌이축이다. <3도> 백9로는…
<6도> 백2, 4로 이쪽을 젖혀이어야 했다. 무슨 차이? 흑5부터 백10까지 <5도>와 똑같이 되어도 지금은 흑의 바깥수가 하나 줄어 있어 백을 회돌이축에 빠뜨릴 시간이 없는 것.
이광구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