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이 명예직인 건 확실하지만 어느 순간 가장 불명예스러운 사람으로 전락할 수 있다.” 한 K리그 클래식(1부 리그) 감독의 진솔한 속내였다.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최고 명문 클럽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27년이나 이끌었던 알렉스 퍼거슨 감독(은퇴)이나 26년간 여러 클럽들을 오가면서 맹위를 떨친 독일 분데스리가 바이에른 뮌헨의 유프 하인케스 감독(은퇴) 등의 사례는 국내에서 눈 씻고 찾아볼 수 없다. 요즘 프로축구가 수상하다. 분명 계약기간은 있는데, 잘 지켜지지 않는다. 제 아무리 성적에 웃고 울어야 하는 승부의 세계라지만 때로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다. 떠나야 할 때를 자신이 직접 정할 수 있었던 퍼거슨 감독이나 하인케스 감독은 정말 행복한 사람이다.
# 휴지조각에 불과한 계약서?
대구FC는 지난 4월 당성증 감독(왼쪽)을 내보내며 자진사퇴를 강조, 잔여연봉을 주지 않았다. 연합뉴스
하지만 국내 축구계는 조금 지나칠 정도다. 계약이 너무 쉽게 파기되는 경향이 짙다. 구단 및 감독이 약속하고 합의하는 계약기간이 끝까지 잘 지켜지는 경우가 극히 적다. 전임 감독들이 물러났을 때 K리그 구단들이 기자들에게 배포하는 보도자료에서 으레 내놓는 문구는 이렇다.
“○○○ 감독이 성적 부진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자진사퇴를 했다.”
항상 똑같은 건 아니지만 큰 틀에서 보면 이와 거의 다르지 않다. 여기서 ‘우리(구단)가 먼저 성적 부진의 책임을 물어 경질하기로 했다’는 내용은 잘 다뤄지지 않는다. 항상 감독이 먼저 구단을 찾아와 고위층에 스스로 사퇴를 표명하고, 물러나기로 했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그 속을 살펴보면 불편한 진실이 숨어있다.
감독들이 물러났을 때 대개 자진사퇴 형식을 취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자진사퇴와 경질은 분명 의미가 다르기 때문이다. 프로의 세계인 만큼 여기에는 역시 돈 문제가 걸려 있다. 대개 감독들은 계약기간을 채 마치지도 못하고 물러날 때가 많다. 그러나 자진사퇴를 하게 되면 남은 기간에 해당되는 잔여 봉급을 주지 않아도 된다는 인식이 파다하다. 반면 경질을 하게 되면 남은 임금을 전부 줘야 한다. 이런 사유로 인해 K리그 구단들은 경질이 아닌 사퇴에 초점을 둔다.
아직 반환점도 찍지 못했지만 올 시즌에도 벌써 2명의 프로구단 감독들의 목이 달아났다. 대구FC 당성증 전 감독이 첫 번째(4월)였고, 경남FC 최진한 전 감독이 두 번째(5월)였다. 대구와 경남 구단 모두가 감독이 스스로 물러났다고 공식 발표했다. 당 전 감독과 최 전 감독은 아직 계약기간이 남아있었다. 당 전 감독의 경우, 작년 말 대구와 1+1(년) 계약을 맺었고, 2010년 12월 경남에 부임한 최 전 감독은 올해 말까지가 보장된 임기였다. 구단과는 2+1(년) 계약을 했는데, 올해는 임기 연장 옵션이었다.
그런데 양측이 택한 방식은 달랐다. 대구가 취한 방식이 상당히 아쉬웠다. 계약서에 옵션 조항으로 붙은 ‘+1년’은 차치하더라도 올해까지는 연봉을 줘야 했다. 그게 양자간 합의에 따른 당연한 도리였다. 하지만 대구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당시 대구 관계자는 “당 감독이 먼저 사임 의사를 전해왔고 잔여연봉에 연연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처음 당 전 감독이 대구를 떠나게 됐다는 소식이 ‘경질’로 외부에 알려졌을 때, 대구는 곧바로 “경질이 아닌 사퇴”라고 반박했다.
반면 경남은 다른 설명을 덧붙였다. “결코 구단이 사퇴를 강요하지는 않았다. 최진한 전 감독이 먼저 사퇴 의사를 전했고, 구단은 이를 수렴했다. 잔여연봉 문제는 합의를 통해 잘 마무리했다. 연봉 문제는 이견 없이 말끔히 해결됐다.” 한 축구 관계자는 “경남이 최 전 감독에게 (잔여 연봉) 전부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약속했던 것으로 안다”고도 했다.
# 앞으로도 불편할 미래?
승강제 시스템 도입 후 임기 중 감독 교체가 잦아졌다. 강원FC와 경남FC의 경기. 왼쪽은 5월 사퇴한 경남FC 최진한 전 감독. 사진제공=경남FC, 사진제공=강원FC
그렇다면 다른 종목은 어떨까. 유감스럽게도 프로축구가 유별난 편이다. 프로야구와 프로농구 등은 상당히 다른 자세를 취한다. 똑같은 사퇴 형식이었지만 모 유명 야구 감독은 전체 계약기간의 1/5만 채우고 물러났음에도 다른 팀에 부임하기까지 매달 월급을 받았다고 한다. 다른 야구 감독도 잔여 연봉을 모두 받았다고 알려진다.
하지만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프로축구단이 감독들과 헤어질 때마다 앵무새처럼 반복해온 ‘성적 부진’이 진짜 이유라면 단순히 감독 한 명에게만 모든 책임을 묻기가 어렵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반응이다. 감독들의 지도력에 문제가 있었다면 해당 감독들을 선임하고 지휘봉을 맡겼던 구단들도 책임론에서 자유롭지 않다.
복수의 축구인들은 “구단들이 항상 감독과 이별할 때 외치는 성적 부진이 과연 감독들의 무능함에서만 비롯되는지 생각해 봐야 한다. 감독이 원한 선수들을 제대로 사주지 못하고, 클럽하우스나 전용 훈련장 등 원하는 환경을 만들어주지 못한 부분에 대해 구단들이 왜 생각조차 안 하는지 모르겠다. 성적이 좋으려면 좋은 선수 구성과 좋은 환경이 1차 조건이다. 최고 스타들이 모여야만 꼭 최고의 팀이 된다는 보장은 없지만 어느 정도 분위기를 조성해줘야 한다. 국내에서는 도·시민구단들이 주로 감독 교체 조급증에 걸린 경우가 많은 것 같은데, 과연 구단이 만들어놓은 여건이 좋은 결실을 맺을 만큼이 되는지 돌이켜봐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사상 처음 2부 리그(챌린지) 강등 팀들이 탄생한 지난 시즌에도 수많은 감독들이 자신의 임기를 끝내지 못하고 물러났다. 올해는 승격-강등 제도의 본격 시행이 예고됐기에 경쟁이 더 치열해질 전망이다. 막간의 휴식기가 끝난 뒤 6월 말 재개될 후반기는 감독 교체 횟수가 훨씬 더 늘어날 수도 있다. 1, 2부 리그를 합쳐 앞으로 몇 명의 사령탑들이 지휘봉을 내려놓을지는 예상하기 어렵다. 물론 이러한 모습이 잘못됐다고 할 수도 없다. 다만 구단도 감독을 진정 동반자로 여긴다면 일정 부분 함께 ‘책임지는’ 자세도 필요한 시점이다. 그게 프로다.
남장현 스포츠동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