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곳곳에 도사린 ‘위험’을 무릅쓰고 귀국한 송두율 교수는 이제 이 나라에서도 쫓겨날 처지에 놓였다. 사진은 지난 2일 기자회견을 위해 아카데미하우스에 들어서는 송 교수.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
국정원이 지난 1일 국회 정보위원회에 보고한 송 교수의 주요 혐의는 송 교수가 지난 1991년 ‘북한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 김철수’로 지명된 뒤 94년 7월 김일성 장례식 당시 서열 23위의 장의위원 등으로 활동했고, 91~95년 사이 매년 북한 공작원을 통해 연구비 등 명목으로 2만~3만달러씩을 받았다는 것 등이다. 또 송 교수가 73년 북한을 처음 방문했을 때 노동당에 입당했고, 그동안 북한의 각종 기념일에 ‘충성서약서’를 보냈다는 혐의 등도 포함됐다.
만약 이런 혐의가 그대로 인정되면 송 교수는 국가보안법의 반국가단체 가입 및 금품수수죄 등으로 중형에 처해질 수 있다. 그러나 송 교수는 “국정원이 나의 핵심 혐의에 대한 조사 결과를 왜곡했다”며 반발하고 있다. 그는 지난 2일 기자회견을 열어 “북한 당국으로부터 권력서열 23위의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지명된 사실을 통보받은 적이 없는데도 국정원이 마치 내가 그런 자백을 한 것처럼 사실관계를 왜곡했다”고 주장했다. 북쪽으로부터 제공받은 돈도 공작금과는 전혀 무관하며 독일의 ‘한국학술연구원’ 재건비로 썼다고 송 교수는 밝혔다.
국정원으로부터 사건을 송치받아 수사중인 검찰 관계자는 “국정원과 송 교수의 말이 엇갈리는 것은 시각 차 때문일 수 있다”고 말했다. 예를 들어 ‘후보위원 논란’의 경우, 송 교수 입장에서는 “서열 23위의 후보위원”이라고 자백한 적이 없지만 국정원으로서는 그동안 자체 수집한 정보 및 정황증거에 송 교수의 관련 진술을 더해 그렇게 결론을 낼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검찰 주변에서는 “송 교수 사건의 실체적 진실은 국정원의 수사 결과와 송 교수의 해명 사이의 어디쯤에 있는 것 아니냐”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하지만 국정원측은 “송 교수한테 노동당 입당과 김철수 관련 자백을 받은 것은 우리 수사팀의 개가”라며 조사 내용에 자신감을 보이는 것으로 전해져, 검찰의 수사 결과에 이목이 쏠리고 있다. 송 교수가 굳이 이번에 ‘위험’을 무릅쓰고 귀국을 강행한 배경에 대해서도 다양한 추정이 제기되고 있다. 그중 가장 유력한 분석은 “송 교수가 너무 순진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순진하다’는 표현의 속뜻은 복합적이다.
먼저 송 교수가 국정원의 정보수집 능력을 과소 평가해 과거 행적이 세세히 드러날 것을 예상하지 못한 상태에서 한국행을 결정했다는 얘기다. 그러나 국정원은 97년 망명한 황장엽 전 북한 노동당 비서를 통해 ‘송두율=김철수’란 유력한 첩보를 입수한 것 외에도 미국으로 망명한 독일주재 북한 공작원의 심문 첩보를 미국 중앙정보국(CIA)으로부터 넘겨받는 등 입증을 위한 준비를 했다. 국정원은 이 과정에서 송 교수가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칭송하는 내용의 축전을 띄운 사실 등을 밝혀낸 것으로 알려졌다.
▲ 지난 2일 KBS 국감에서 의원들이 송두율 교수 프로그램을 보고 있다. 이종현 기자 | ||
게다가 송 교수는 황장엽씨와 3년간 벌인 ‘김철수 진실게임’에서 한국의 재판부가 ‘근거 없다’고 자신의 손을 들어준 데 대해 고무돼 국면을 낙관적으로 오판한 듯하다. 정보기관의 특성상 국정원이 재판부에 공개적으로 제시할 수 있는 증거자료가 제한될 수밖에 없어 빚어진 상황이란 점을 간과한 것이다.
자신이 93년 취득한 독일 국적이 방패막이로 쓰일 수 있을 것이란 점도 판단착오였다. 그는 입국 직전 “독일 정부가 신변의 안전을 보호하겠다고 알려왔으며, 만약 불미스런 일이 있으면 자동 개입하게 될 것”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하지만 ‘친북활동을 한 한국인 송두율’에 대한 독일 정부의 입장은 냉담했다. 독일 정부는 송두율씨 조사가 진행되는 동안 “한국정부의 입장과 공안당국의 조사결과를 존중할 것”이란 입장을 밝혔다.
또 송 교수는 검찰 재소환에 앞서 조사과정의 ‘부당성’을 호소하러 5일 한국주재 독일대사관을 찾아갔지만 대사를 만나지 못한 채 휴일 당직근무중인 무관을 면담하는 데 그쳤다. 이런 다양한 관측에도 불구하고 그의 입국을 결정지은 요인이 무엇인지 드러나기에는 좀 더 시간이 필요한 듯하다. 특히 그의 입국과 관련해 노무현 정부의 고위 인사들이나 초청측에서 송 교수에게 어떤 수준의 메시지를 전달했는지도 규명돼야 할 대목이다.
관련 인사들은 한결같이 송 교수 입국시 선처 등을 보장했다는 관측을 부인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송 교수가 입국하면 조사나 처벌이 불가피하다는 입장을 전달했음에도 그가 입국을 강행했다고 주장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 이와 함께 한나라당은 정권 핵심부와 송 교수 주변 인사들이 ‘조사 뒤 사면’을 전제로 송 교수의 입국을 합의해 추진했다는 소위 ‘기획 입국설’을 제기한 상태다. 한나라당 의원들은 정보위 국정감사 등에서 송 교수의 귀국을 앞두고 독일을 방문한 박정삼 국정원 2차장과 이종수 KBS 이사장 등이 ‘기획 입국’에 연루됐다는 의혹을 제기했으나, 당사자들은 펄쩍 뛰고 있다.
어쨌든 확실한 것은 송 교수 주변 인사는 물론, 정부 당국 일각에서도 국정원 조사에서 송 교수의 친북 혐의가 애초 알려진 것보다 중하게 드러난 데 대해 “이 정도일 줄은 미처 예견하지 못했다”며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송 교수 입국을 추진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관계자들은 “송 교수가 사전에 전혀 노동당 입당 사실 등을 밝히지 않아 모르고 있었다”며 “문제가 이렇게 커질 줄 알았다면 좀 더 신중하게 일을 추진했을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김 변호사도 “송 교수가 최소한 귀국 직후 노동당 입당 및 김철수 관련 부분을 먼저 털어놓고 국민들에게 사과를 했다면 상황이 이처럼 불리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며 안타까움을 나타낸 것으로 전해졌다.
▲ 송두율 입국 배경에 대해 일각에선 “국정원이 정보보고 를 제대로 하지 않아 청와대가 오판했다”는 음모론도 나돌고 있다. 사진은 국정원 청사 전경. | ||
그러나 국정원 고위관계자는 최근 언론사 중간 간부들을 만난 자리에서 “송 교수 혐의가 간단하지 않은 것을 알고 송 교수의 귀국을 막아보려고 나름대로 노력했다”며 “입국 직전 송 교수에 대해 체포영장을 신청하고, 이 사실이 언론에 알려진 배경도 이런 노력과 무관하지 않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관계자의 해명은 국정원 등 공안당국과 송 교수 귀국을 추진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사이에 ‘사전 교감 및 조율’이 있었다는 한나라당 주장을 부인하는 것이기도 하다. 정부 당국과 송 교수 주변에서는 “이번 사태는 어느 한쪽의 책임이라기보다는 북한에 치우친 과거 행적을 서둘러 청산하지 않은 송 교수의 과오와 관련 정황을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송 교수의 귀국을 추진 또는 묵인한 일부 재야인사 및 정부 당국의 아마추어리즘이 빚어낸 결과”라는 분석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송 교수의 실정법 위반 혐의가 기정 사실화하면서 이제 남은 것은 송 교수의 신병처리 방향이다. 이를 두고 청와대와 검찰 등은 ‘국외 추방’ 방안에 무게를 싣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경우 검찰의 공소보류 조처와 동시에 추방이 이뤄질 가능성이 높으며, 한 번 추방되면 5년간 재입국이 불허된다.
공안사건 특성상 송 교수 처리에 막강한 발언권을 지닌 국정원측은 이미 검찰 송치 전에 ‘시대의 변화와 국제 여론, 송 교수의 독일인 신분 등을 고려할 때 송 교수를 재판에 넘겨 분란을 키우기보다는 국외로 추방하는 것이 적절하다’는 결론을 낸 것으로 전해졌다. 이런 판단은 국제사면위원회 등 국제적 인권단체들이 폐지를 주장하고 있는 국가보안법을 송 교수에게 적용할 경우 예상되는 논란과 독일 정부와의 외교적 관계 및 남북 교류 등에 미칠 영향을 종합적으로 감안한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 정부 당국은 송 교수를 추방하지 않고 재판에 넘길 경우 확정 판결이 날 때까지 우리 사회가 소모적인 이념논쟁에 휘둘릴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하고 있다. 반면 송 교수측은 지난 2일 기자회견에서 밝힌 대로 “추방을 당하느니 형사처벌을 받겠다”는 태도를 고수하고 있다. 송 교수의 한 측근은 “송 교수가 37년 만에 처벌을 각오하고 찾아온 고국으로부터 내쫓기는 상황을 감당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물론 송 교수 사건이 정식 재판에 넘겨질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보수단체 등이 송 교수의 구속기소 등 재판 회부를 주장하고 있고, 송 교수측도 “추방보다는 기소되는 편이 낫다”며 수용 의사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한동안 수세적인 태도를 보여온 송 교수측은 지난 6일 검찰에 “북한으로부터 후보위원 통고를 받은 적도, 임명된 적도 없다”는 송 교수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내용의 반박 자료를 제출하고, 국정원 조사 때 변호인이 입회하지 않은 문제를 정식 제기하는 등 적극적으로 사실관계를 다툴 뜻을 드러내고 있다. 한국 사회에 한동안 잠잠했던 ‘공안 바람’을 다시 몰고온 송두율 교수 사건의 실체적 진실이 가려질 수 있을지 주목된다.
이진기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