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축구협회와 2015년까지 계약한 홍 감독이 대표팀 지휘봉을 잡으면서 강조한 사실이 있다. 다름 아닌 ‘원(One)’이었다. 여기에는 하나됨이라는 의미가 담겨있는데, 홍 감독은 “앞으로 대표팀은 원 팀, 원 스피리트(Spirit), 원 골(Goal)을 향한다”는 새로운 슬로건을 비전으로 제시했다.
실제로 그랬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분열되고 서로 갈라섰던 대표팀이었다. 하지만 홍명보호는 확실히 달라졌다. 태극마크를 단 선수들은 내내 진정한 ‘하나’가 무엇인지를 몸소 보여줬다. 친한 선수들이 끼리끼리 어울리면서, 여기에 속하지 못한 소외된 일부가 있었음을 보여준 과거와 판이하게 달랐다. 모든 게 정리됐고, 통일된 복장으로 2열종대로 숙소에서부터 훈련장으로 향하는 선수들의 모습은 상당히 진지하기까지 했다. 일본과 중국 취재진조차 깜짝 놀라며 “저런 장면은 처음 봤다. 뭔가 확실히 규율이 잡힌 인상”이라고 했다.
경기장에서도 이러한 모습이 연출됐다. 경기가 끝나면 라커룸으로 이동해 샤워를 하고 믹스트 존을 빠져나가느라 바쁘게 마련. 그런데 제1기 홍명보호 멤버들은 어떤 결과가 나오든 일렬로 도열해 팬들에 감사를 전했고, 선수단 버스를 향했다.
# 발굴 & 실험
대회 엔트리가 발표되기 전부터 사실 힌트는 있었지만 대표팀 구성은 상당히 파격적이었다. 기자들에게 익숙하지 않은(어쩌면 그럴 기회조차 없었던) 멤버들이 대거 이름을 올렸다. A매치 경험이 아예 없거나 1~2경기 정도에 그쳐왔던 뉴페이스들이 상당수 발탁돼 흥미를 끌었다. 특히 수비라인의 좌우 풀백들이 인상적이었다.
국내 무대에서 뛰는 선수들과 일본 J리그에서 활약 중인 선수들을 고루 섞었는데, 백업 요원들까지 포함해 4명 중 3명(김창수-김민우-김진수)은 J리거, 한 명(이용)은 국내 선수였다. 김진수(알비렉스 니가타)는 특히 강렬했다. 대회 1차전인 호주전에서 김진수는 왼쪽 풀백을 완벽하게 소화했다. 올림픽팀을 이끌면서 홍 감독이 꾸준히 체크해온 김진수는 명단 발표를 앞두고 ‘일본통’ 황보관 기술위원장이 적극 추천해 선발된 인물. 홍 감독은 “(김)진수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대학 시절부터 계속 지켜봤다”고 설명했다.
베일에 싸여 있던 홍명보호의 기본 틀은 지난해 올림픽 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원톱을 세운 뒤 중원에 2명을 배치하는 형태의 4-2-3-1 포메이션이었다. 허리진을 두텁게 하는 한편, 공격과 수비에 안정감을 주는 형식이었다.
지난 24일 열린 2013 동아시안컵대회 2차전 한국과 중국의 경기. 중국의 정청 골키퍼가 서동현의 슛을 막아내고 있다. 연합뉴스
누군가에게는 만회를 위한, 또 다른 이들에게는 도전을 위한 장이었다. 새 얼굴들이 많이 뽑혔지만 모두가 그런 건 아니었다. 런던올림픽 동메달리스트들이 대거 승선한 가운데, 이런저런 사연들로 인해 올림픽 출격이 무산됐던 이들도 많았다.
대표적인 케이스가 스트라이커 김동섭(성남 일화)-윙 포워드 윤일록(FC서울)-중앙수비수 홍정호(제주 유나이티드)였다. 김동섭과 윤일록은 올림픽 홍명보호가 아시아 지역 예선을 거치는 동안 꾸준히 활약했지만 대회 최종 엔트리 선정을 앞두고 갑작스런 컨디션 난조로 런던행이 불발되는 아픔을 겪었다. 홍정호는 불의의 부상으로 한동안 그라운드에 출전할 수 없었다. 이들에겐 확실히 ‘치유’의 찬스였다. 플레이가 100% 완벽하지는 않았어도 가능성에 초점을 둔 상황에 그라운드 위에서 노력하는 모습은 충분히 희망적이었다.
최강희호에서 아쉬움을 맛본 선수들도 있었다. 중앙수비수 김영권(광저우 에버그란데)-윙 포워드 고요한(FC서울)이었다. 이들에게는 ‘치유’라는 측면과 함께 ‘명예회복’이라는 또 다른 키워드가 있었다. 브라질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 과정에서 보여줬던 치명적인 실수 탓이다. 김영권은 6월 열린 이란과 아시아 최종예선 마지막 대결(0-1 한국 패)에서 결승 골의 빌미를 제공하는 실책을 범했고, 고요한은 작년 9월 우즈베키스탄 원정(2-2 무승부)에서 축구화를 잘못 준비한 탓에 그라운드에서 수차례 미끄러졌다. 부족한 원정 경험이 빚은 해프닝이었지만 단 한 번의 실수가 승부를 가르는 최종예선 여정에서 고요한은 더 이상 태극마크를 달 수 없었다. 하지만 동아시안컵에서 모두가 원한 바를 이뤘고, 내일을 기대할 수 있게 됐다.
홍 감독도 호주전을 앞두고, “오늘보다 내일, 내일보다는 그 다음 경기에서 계속 발전하는 모습을 보이겠다”고. 브라질월드컵에서 멋진 선전을 향한 홍명보호는 그렇게 당찬 발걸음을 뗐다.
남장현 스포츠동아 기자
“거, 미안한데…”
동아시안컵에 홍명보호만 있는 건 아니었다. 윤덕여 감독의 여자 축구도 2015 캐나다 월드컵을 향한 준비 과정에 놓여 있었다. 월드컵 본선 티켓이 기존 3장에서 5장으로 늘어나면서 내년 5월 베트남에서 열릴 아시아 선수권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진 게 사실.
그래도 세계 정상급으로 군림 중인 북한 여자 축구의 방한도 상당한 관심이었다. 2005년 대회 이후 8년여 만의 방문에 외신 기자들도 남다른 취재 열기를 보였다. 항상 그래왔듯이 ‘북한’이라는 표현 대신, ‘북조선’ 혹은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북측’이란 표현을 요구한 태도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었지만 확실히 정중해졌다.
그간 ‘북한’이란 용어를 쓰다가 한순간에 표현을 바꾸는 건 기자들에게도 어려운 일. 한 기자가 공식 기자회견에서 의도치 않게 “북한”이라고 했다가 북한 관계자에 의해 제지받는 상황이 연출됐다. 그래도 “거, 미안한데”라는 문장을 먼저 붙여줬다. 감(?)을 못 잡은 한 중국 기자는 “요즘 남북 관계가 경색 국면인데, 한국을 찾은 느낌이 어떠냐”고 물었다. 예전 같으면 자리를 박차고 나갈 수도 있던 순간. 북한 관계자의 유화 정책은 또 한 번 빛을 발했다. “축구하러 왔을 뿐”이라며 자칫 정치적으로도 민감할 수 있는 질문을 유연하게 넘겨 달라진 태도를 실감케 했다.
남장현 스포츠동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