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의 베테랑 배칠수(왼쪽)와 야구의 베테랑 이호준은 각자 분야는 다르지만 평소 호형호제하는 절친한 사이다.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2012년 FA 자격으로 신생팀 NC다이노스에 입단했을 때만 해도 이호준의 ‘오늘’을 상상하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나이 마흔 살을 목전에 둔 그는 올 시즌 97경기에 출전해서 2할9푼5리 16홈런 75타점(21일 현재)으로 전성기 못지않은 활약을 펼치고 있다. 성대모사의 달인 배칠수도 마찬가지. 1년 5개월 전, 지상파를 떠난 그는 TBS 교통방송 라디오 <배칠수 전영미의 9595쇼>(낮 12시∼2시)를 맡아 성대모사와 시사 풍자 콩트를 곁들인 방송 진행으로 호평을 받고 있다. <배칠수 전영미의 9595쇼>는 올 초 한국PD연합회가 주최한 ‘한국PD대상’ 라디오 작품상 최종 후보에까지 오르기도 했다.
각 분야에서 ‘고수의 향연’을 펼쳐 보이고 있는 두 베테랑들과의 재미있는 인터뷰를 진행했다.
배칠수(배) : 호준아, 요즘 네가 잘하고 있는 걸 보니까 정말 기쁘다. 너 덕분에 나이 먹고 일하는 사람들, 어깨 펴고 다닐 수 있을 것 같아. 야구계에서는 ‘인생은 이호준처럼’이란 말이 유행이라면서? 역시, 야구는 잘하고 볼 일이야.
이호준(이) : 그러게요 형. 저도 이렇게 좋은 성적을 낼 줄 몰랐어요. 제가 정말 좋은 팀을 만난 것 같아요. 처음에는 신생팀이라 걱정도 많고, 어려움이 더 클 거라고 예상했는데, 그보다는 기쁨과 보람이 훨씬 더 크더라고요. 팀과, 또 감독님과, 그리고 후배들과의 궁합이 아주 환상적입니다.
배 : 넌 어딜 가도 잘할 거라고 생각했어. 야구선수 중에서 너처럼 책임감 강한 사람은 본 적이 없으니까. 오늘 야구장 오면서 이전에 너랑 나눴던 얘기들이 생각나더라. 2007년 말 SK와 FA 계약을 맺고 이듬해 무릎 수술을 받았었잖아. 수술 후 복귀해서 성적이 제대로 안 나올 때 네가 나한테 이민가자고 했던 말, 기억하니?
이: 하하, 그럼요. 그때는 정말 심각했었으니까요. 형, 전 제가 ‘먹튀’라는 얘길 듣는 선수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FA 계약으로 대박치자마자 바로 수술을 받으니까 일부 팬들이 돈만 많이 받고 게임을 못 뛴다면서 엄청난 비난을 했었거든요. 그때는 한국이 정말 싫었어요. 이런 저런 비난 속에서 사는 게 무서웠었죠. 그래서 무조건 도망가고 싶었고, 혼자 가기엔 걱정이 앞서 형한테 같이 이곳을 뜨자고 얘기했던 거죠.
배 : 내가 보기엔 그렇게 도망치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고, 그냥 사라져버리면 야구선수 이호준은 ‘도망자’라는 꼬리표가 붙게 되잖아. 그래서 내가 널 만류했던 걸로 기억된다.
이 : 형이 저를 많이 달래주셨어요. 그래도 야구선수 이호준일 때가 제일 행복한 거라면서. 가족들 데리고 미국으로 가려고 이민 준비를 하다가 결국에는 형 얘기 듣고 그냥 야구나 하자고 주저앉았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안 가길 정말 잘했어요. 형이 절 살려주신 셈이죠(웃음).
배 : 호준이가 NC다이노스와 계약을 하면서도 고민이 많았던 걸로 알아. 어디를 가도 야구를 할 수 있기 때문에 난 호준이가 좋은 선택을 하리라 생각했었어.
타격 연습을 하는 이호준.
배 : 그런 점에서 나도 호준이랑 비슷한 경험을 했지. 너도 알다시피 내가 지상파 라디오에서 잘나갔잖아. 뭐 지금도 최양락 선배가 진행하시는 MBC의 <재미있는 라디오>를 하고 있지만, 낮 12시부터 2시까지 진행하는 SBS <배칠수 전영미 와와쇼>가 끝났을 때는 많이 허탈했던 것 같아. 그러다 TBS 교통방송 라디오에서 시사 프로그램을 맡아달라고 부탁해올 때 조금 갈등을 했었어. 지상파 3사를 벗어나는 게 맞는 건지, 이렇게 나왔다가 다시 돌아갈 수 없게 되는 건 아닌지 하는 걱정들이 있었지. 고민 끝에 전영미 씨와 다시 교통방송에서 <배칠수 전영미의 9595쇼>를 시작했는데, 반응이 정말 좋은 거야. 청취율이 올라가면서 우리 방송이 전국 라디오 청취율 순위에서 처음으로 50위 권 안에 진입했을 때는 이전에 느끼지 못했던 보람이 생기더라고. 좋은 스태프들과 함께 방송을 만들고 희로애락을 겪으면서 배우고 느끼는 점들이 정말 많은 것 같아.
이 : 어휴, 형은 베테랑이시잖아요. 어디에 가시더라도 ‘대접’받는 분인데, 그런 걱정을 하셨다고 하니 쉽게 이해가 안 가네요. 형은 10년 후에도 그 자리에 계실 것 같아요. 이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으셔서요. 제가 형을 왜 좋아했는지 아세요? 보통 연예인 하면 겉멋도 들고 화려함을 추구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형은 야구를 좋아하셔서 그런지 선수를 위할 줄 아시더라고요. 술도 절대 안 하시고. 더욱이 형은 야구를 진짜 잘하시잖아요. 제가 형이 던지는 걸 비디오로 보고선 얼마나 놀랐는지 아세요? 폼이 군더더기 없이 아주 깔끔했어요.
배 : 10년 전인가? 인천에서 사회인 야구 시합을 할 때 우연히 김시진 감독님을 뵌 적이 있었어. 그때 감독님께서 내가 공 던지는 걸 보셨었나봐. 조심스럽게 다가 오셔선 몇 살이냐고 물어보시더라고. 그래서 서른 살이라고 했더니 소리 없이 웃으시면서, “다듬어지지 않은 상태로도 134km 정도 나오는데, 내가 두 달만 열심히 가르치면 90마일은 찍겠다고”라고 말씀하시는 거야. 그래서 내가 “어휴 감독님. 말씀만이라도 감사합니다. 전 그냥 방송이나 열심히 하겠습니다”라고 인사드렸지 하하.
이 : 형은 그렇게 야구를 좋아하시면서 왜 선수 생활을 하지 않으셨어요?
배: 왜 안하고 싶었겠어. 초등학교 때 야구하고 싶어서 누나들과 함께 야구부 감독님을 찾아갔는데 당시 내가 키가 굉장히 작았거든. 감독님 눈으로는 내 체격이 별로라고 생각하셨던 거야. 그래서 누나들한테 그냥 공부나 시키라고 말씀하시더라고. 내 키가 이렇게 클 줄 알았더라면 그때 야구했겠지. 그 아쉬움을 사회인 야구나 연예인 야구단에서 풀고 있지.
배 : 수비하다가 부딪히는 바람에 무릎 전후방 십자인대가 파열됐어. 수술하고 고생 진짜 많이 했다. 이젠 이전처럼 못 던져. 야구하는 건 어렵다고 봐야지.
이 : 형의 부상 정도는 거의 장애인급인데요? 나도 그때 무릎 연골 수술 받았잖아요. 십자인대는 진짜 아팠겠어요. 그래서 아직 걷는 게 불편하시구나. 하여튼 형, 진짜 대단하세요. 프로 야구선수들 중에서 형 모르는 선수들은 거의 없을 거예요. 워낙 야구를 좋아하시니까 소문이 다 난 거죠.
배 : 호준아, 내가 보기엔 네가 은퇴하면 각 방송사마다 너를 스카우트하려는 사람들이 줄을 설 것 같아. 워낙 입담이 좋은 데다 구수한 말솜씨로 인해 팬들이 많잖아. 지금 해설하고 있는 (이)병훈이 형이 너로 인해 위기 의식을 느낄 것 같다(웃음).
이: 형, 저도 솔직히 그쪽(방송)에 관심이 있어요. 현장에 남는 것보다는 방송 일을 하면서 새로운 공부를 해보고 싶어요. 왠지 저랑 잘 맞을 것 같거든요. 만약 제가 해설을 하게 되면 형이 많이 도와주셔야 해요. 그리고 제 꿈이 있다면 제 아들이나 형의 아들이 야구선수가 돼 프로에서 뛸 때 형이랑 제가 같이 야구 중계를 하는 거예요. 진짜 멋있을 것 같지 않아요?
배 : 와, 상상만 해도 전율이 느껴진다. 내가 둘째가 아들이라는 소리를 듣고 기뻐했던 이유가 뭔지 아니? 야구선수를 시킬 수 있다는 사실 때문이야. 네 큰아들 동훈이는 야구하고 있지?
이 : 어휴, 말도 마세요. 지금 초등학교 5학년인데 야구하다가 얼마 전에 축구로 갈아 탔어요. 마음을 바꾸려고 김광현(SK)을 소개시켜주면서 많이 꼬드겨봤지만 밤새 메이저리그가 아닌 프리미어리그 보면서 축구에만 열광해요. 아빠를 절망에 빠트리고 있습니다. 지금.
경기를 앞둔 터라 두 사람의 대화는 더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평소 전화통화만 하다 1년여 만에 얼굴을 봤다는 ‘고수’들. 서로에 대한 조언과 격려, 그리고 감사함을 주고 받으며 마음이 부자가 된 채로 아쉬움을 뒤로 한 이호준, 배칠수를 통해 남자의 진한 우정의 한 단면을 볼 수 있었던 것 같다.
이영미 기자 riverofly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