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28일 한나라당의 ‘투쟁본부장’(전략기획위원장)으로 임명된 홍준표 의원은 본격 싸움에 앞서 노무현 정권에 가벼운 잽 한방을 날리고 있었다. 노 정권은 과연 잠자는 한나라당의 코털을 건드린 것일까. 아니다. 상황은 오히려 그 반대의 경우로 치닫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은 지난 11월2일 청와대 기자간담회에서 “검찰수사를 통해 대선자금 전모가 밝혀져야 한다”는 뜻을 밝혔다. 이로써 노 대통령이 지난 10월10일 질러버린 재신임 ‘화재’가 불과 한 달여 만에 대통령 측근 비리에서 정치권 전체의 불법 대선자금 규명으로 번져버렸다.
누구도 선뜻 이 ‘대형 화재’를 끄려고 나설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오히려 청와대의 ‘신뢰’ 아래 검찰의 불방망이는 더욱 기세를 떨치고 있다. 특히 한나라당은 재신임 정국 초기 노 대통령의 ‘메시지’를 충분히 헤아리지 못해 사전에 불길을 잡지 못했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먼저 한나라당의 상황은 참담하다. 한나라당은 이번 대선자금 전투에서 청와대보다 더 큰 상처를 입을 가능성이 크다. 한나라당의 특검 밀어붙이기 기저에는 당 지도부가 노 대통령의 측근 비리에 대한 상당한 첩보를 비축하고 있을 것이라는 믿음도 깔려 있다. 하지만 현재로선 이 믿음직한 카드에 별로 신빙성이 없다는 해석이 유력하다.
지금도 최병렬 대표와 홍사덕 총무 등에게로 많은 대통령 측근 관련 비리 제보가 쏟아져 들어오고 있지만 말 그대로 ‘첩보’ 수준일 뿐 야당의 한계상 확인할 도리가 없다는 게 치명적인 약점이다. 여의도연구소장을 맡고 있는 한나라당 윤여준 의원도 이에 대해 “당 지도부가 많은 정보를 수집하고 있다는 얘기는 들었다. 하지만 신빙성에서는 여전히 의문점이 많다”고 털어놓았다.
반면 노 대통령은 이번 대선자금 정국에서 강한 자신감을 보이고 있다. 노 대통령은 지난 11월2일 기자간담회에서 강한 어조로 “수사하는 과정에서 돈을 마구 끌어다 쓴 쪽과 적극적으로 절제한 쪽이 드러날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불법 대선자금을 썼어도 정도의 차이가 있고 이런 면에서 한나라당이 훨씬 더 많은 비도덕적 행위를 했을 것이라는 판단을 했다는 것이다. 또한 측근 비리도 치명상을 입을 정도로 심각한 수준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대선자금 정국에 대처해왔다는 것이다.
심지어 일부에서는 노 대통령이 참고인 자격으로 검찰이나 특검의 ‘조사’에도 응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추측도 나오고 있다. 여기에는 노 대통령이 측근들 비리나 정치자금 문제로 청와대 문을 나서는 최악의 상황에도 대비하고 있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이와 관련해 청와대 출입기자들은 이미 노 대통령의 ‘사생결단’ 의지를 읽을 수 있었다고 말한다.
청와대의 한 출입기자는 “노 대통령은 ‘정치판만 뜯어고칠 수 있다면 자신은 죽어도 좋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다. 수차례 이런 ‘멸사봉공’ 의지를 밝혔지만 야당에서는 정략적이라며 믿으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대통령은 이미 판도라의 상자를 열고 그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고 전제하면서 “혼란을 우려하는 일부 견해도 있으나 대통령의 현 시국상황에 대한 인식은 분명하다. ‘80년대 민주화 운동이 일으킨 사회변혁이 태풍이었다면 현재의 변화는 파도 정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는 역설적으로 앞으로 더 강도 높은 정치개혁의 후폭풍이 휘몰아칠 수도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사회여론연구소 정기남 부소장은 이번 대선자금 정국의 끝이 어디까지인지 아무도 예단할 수 없다고 보고 있다. 그는 “노 대통령 자신도 앞으로 대선자금 정국이 어떻게 끝날지 모를 것이다. 또한 어떤 그림을 그리려고 미리 재단하지도 않을 것이다. 누구도 폐허가 된 뒤에 자라나는 새싹들의 모습을 상상하지 못한다”고 말하면서 “지금은 시작에 불과할 뿐이다. 앞으로 현재보다 훨씬 더 큰 핵폭풍이 몰아칠 것이다. 대선자금 수사가 마무리되면 사법처리가 잇따른 다음 여야는 새로운 제도개혁에 합의하고 새로운 싹을 틔워낼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청와대’는 노 대통령의 심중을 가장 잘 파악하고 있다. 정무수석실의 한 비서관은 최근 흐름에 대해 “대통령의 정치개혁에 대한 뜻은 확고하다. 지금까지 이 문제에 대해선 한 번도 자신의 의지를 번복한 적이 없다. 노 대통령은 이번 대선자금 정국에서 정파적 이익을 따르지 않을 것이다. 오직 국민의 뜻에 따라 판단할 것이다”고 밝혔다.
지난 김영삼 정권 때 정무비서관을 지낸 열린우리당의 김영춘 의원도 노 대통령의 ‘순수한’ 의지를 제대로 읽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노 대통령은 5년 동안 임기를 안정적으로 그럭저럭 끌고 갈 생각은 전혀 없다. 어떻게 해서든 한국 정치·경제의 과거 병폐들을 일소하는 ‘거름’이 되겠다는 자세를 가지고 있다. 정치권은 대통령의 진의를 그대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고 말했다. 또한 대통령이라는 거대한 권력이 자신의 권좌를 내놓을 가능성에 대해서도 “대단히 어려운 결정이지만 노 대통령이기 때문에 그것이 가능하다고 본다. 그분은 안정적인 국정관리 면에서는 후한 점수를 못 받지만 정치개혁 면에서는 열정이 대단하다. 충분히 자신의 자리를 내놓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내가 죽고서 네가 산다면’ 노 대통령에게는 한국 역사상 가장 성공한 대통령이란 훈장이 남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야당의 특검 공세에 거꾸러진다면 역사상 최초로 탄핵의 칼날에 쓰러진 불행한 대통령으로 낙인찍힐지도 모른다. ‘생즉사 사즉생’의 승부가 그를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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