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편 기치조를 죽인 아베 사다는 다음 날인 5월 19일, 시내에서 쇼핑을 했고 영화를 보았다. 그녀의 가방 안엔 종이에 싼 기치조의 성기가 들어 있었다. 그리고 5월 20일엔 도쿄 시나가와의 어느 여관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녀는 마사지를 받고 맥주를 세 병 정도 마신 상태였으며 죽은 기치조에게 편지를 쓰고 자신도 자살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지명 수배 상태에서 일대의 요식업소와 숙박업소에 대한 탐문 수사가 이뤄지고 있었고, 5월 20일 4시 경찰은 아베가 머물고 있는 여관에 도착했다. 그녀는 마치 잡힐 것을 기다리기라도 한 듯, 기모노를 입고 조용히 무릎을 꿇은 채 앉아 있었다. 경찰이 방문을 열자 그녀는 말했다. “아베 사다를 찾고 계신가요? 제가 아베 사다입니다.” 그리곤 가방에서 기치조의 성기를 꺼내 보여 주었다. 그녀는 자신이 기치조를 죽인 것을 인정했다.
이후 심문이 이어졌을 때, 왜 기치조우를 죽였느냐는 질문에 그녀의 안광은 빛났다. “나는 그를 너무 사랑했다. 나는 나의 모든 것을 바쳤다. 하지만 우린 부부가 아니다. 그가 살아 있는 한, 그는 다른 여자의 품에 안길 수밖에 없다. 내가 그를 죽이면, 그 어떤 여자도 그를 만질 수 없다. 그래서 죽인 것이다.”
기치조의 성기를 자른 이유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했다. “머리나 몸뚱이를 자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의 일부를 원했다. 그것은 나의 육체적 기억을 생생하게 만들어주니까.”
수사 내용이 밝혀지자 일본 열도에 호외가 뿌려졌고, 이른바 ‘아베 사다 패닉’이 시작되었다. 충격적인 것은 아베의 행동이 질투에 의한 치정이 아닌 ‘사랑’ 때문에 이뤄진 열정의 결과라는 점이었다. 한편 한때 기치조가 엄청난 대물이라는 루머가 돌았지만, 아베 사다는 이에 명확한 코멘트를 했다. “침대에서 남성의 사이즈는 중요하지 않다. 테크닉과 욕망이 나를 즐겁게 하는 것이고, 그것이 내가 기치조를 사랑했던 이유다.” 이후 그 ‘증거물’(!)은 도쿄대학 의학부의 병리학 박물관으로 옮겨졌고, 2차 대전 이후엔 대중에게 공개되기에 이르렀지만 이후엔 어디론가 사라졌다.
아베 사다의 엽기적 범죄를 영화로 만든 <감각의 제국>은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당시 법정 기록은 이후 여러 작가에 의해 논픽션 문학으로 각색되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그녀는 19세기 말 일본 문학에 등장했던 악독한 여자에 대한 이야기인 ‘독부(毒婦) 장르’의 정점이었다. 일본엔 여성 범죄자의 자전적 고백을 담은 문학의 전통이 있었다. 스가 간노는 천황 암살을 기도하다가 잡혀 1911년에 교수형에 처해졌는데, 그녀는 감옥에서 저항적인 글을 남겼다. 가네코 후미코는 천황 가족을 폭탄으로 몰살시키려 하다가 사형을 당했는데, 천황제의 일본 사회를 비판하는 글을 남겼다. 하지만 아베 사다는 일본 최초로 자신의 섹슈얼리티와 욕망과 희생자에 대한 사랑을 이야기했던 ‘범죄적 여성’이었다.
출소 후 아베 사다는 가명을 쓰며 살아갔다. 그리고 전쟁 이후 요시다 내각의 3S 정책이 선정주의를 부추기면서 대중문화 속에서, 전체주의에 대한 비판과 억압적 정치 이데올로기에 대한 해방의 상징으로 부활했다. 1947년엔 <아베 사다의 에로틱 고백>이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아베 사다도 회고록을 냈다.
그녀는 여기저기서 인터뷰를 하며 돈을 벌었고 연극 <쇼와 시대의 여성>에 출연하기도 했다. 1950년대엔 도쿄의 다운타운에서 술집을 경영했는데 짓궂은 손님들은 “칼 숨겨!” “화장실 가기가 겁나는군” 같은 농담을 던졌다. 이후 조용히 살아가던 그녀는 1970년대에 수녀원에서 경영하는 한 요양원에서 조용히 삶을 마감했다. 이 시기 그녀에 대한 영화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다나카 노보루의 <아베 사다 실록>(1975)에 이어 오시마 나기사 감독은 <감각의 제국>(1976)으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1998년에 오바야시 노부히코 감독의 <사다>가 나왔고 1999년엔 여성 감독 하마노 사치도 영화를 내놓았으며 21세기엔 <감각의 제국 2 사다의 사랑>(2008)과 <감각의 제국 파이널>(2011) 등으로 이어졌다.
김형석 영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