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창용이 8일 밀워키 브루어스와의 메이저리그 데뷔전에서 역투하고 있다. 홍순국 사진전문기자
경기가 끝나고서 임창용은 “솔직히 긴장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라며 “어떻게 공을 던진지도 모르게 시간이 빨리 지나갔다”고 털어놨다.
# “맛집 칼럼니스트 되겠네”
이날 호텔에서 만난 임창용은 활짝 웃으면서도 “머릿속으로 상상한 메이저리그 데뷔전과 실제는 너무 달랐다”는 말로 아쉬움을 나타냈다.
“메이저리그 데뷔전과 관련해 정말 많은 상상을 했다. ‘데뷔전에 앞서 몸은 이렇게 풀고, 공수교대할 때 이렇게 뛰어가야지’하는 상상부터 ‘초구는 어떤 공을 던지고, 첫 타자는 멋지게 삼진으로 잡는다’는 계획까지 세워 놨다. 하지만, 갑자기 등판 지시를 받으며 서둘러 몸을 푸는 통에 상상했던 걸 실행하지 못했다. 거기다 초구가 볼로 들어가고 제구도 흔들리면서 기본적으로 세워놨던 모든 계산이 제로가 됐다.”
상상과 다른 건 그뿐이 아니었다. 프로 17년 경력의 베테랑 임창용이지만, 메이저리그는 적응이 쉽지 않은 무대다. 한국, 일본 구단처럼 하나부터 열까지 선수들을 세심히 돌보리라 예상했으나, 실제는 반대였다.
“여긴 선수들이 다 알아서 준비하는 게 기본이다. 한국, 일본은 선수들이 단체로 스트레칭과 워밍업을 하고, 파트별 훈련을 받는다. 그러나 메이저리그는 ‘정오까지 구장에 모이라’고 하면 선수들이 제 시간에 맞춰 도착하고, 바로 그때부터 실전 훈련에 들어간다. 선수들이 알아서 몸을 풀고 오지 않으면 훈련에 참여하기 힘든 시스템이다. 여기다 미국은 투수조 훈련이 끝났다고 투수들이 클럽하우스로 들어가는 일이 없다. 야수들이 배팅 훈련할 때 외야에 서서 타자들의 공을 받아야 한다. 구장에 일찍 나가야 하는데다 훈련시간까지 길어 무척 몸이 피곤하다.”
아직 확실한 보직이 없다는 것도 임창용의 빠른 메이저리그 적응에 방해가 되고 있다. 임창용은 “보직이 없어 언제 나갈지 몰라 스파이크 끈을 꽉 묶은 채 경기 내내 불펜에서 대기하고 있어야 한다”며 “1회부터 9회까지 스파이크를 신고 있느라 경기가 끝나면 양 발바닥이 무척 아프다”고 토로했다.
스트라이크 존과 마운드는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끔찍하다. 임창용은 “미국 구심들은 몸쪽 스트라이크 판정에 정말 인색하다”며 “웬만한 몸쪽 공은 죄다 볼로 판정하는 통에 볼카운트 싸움에서 불리할 때가 많다”고 밝혔다. 마운드도 한국, 일본보다 훨씬 딱딱해 투구 시 앞발인 왼발을 뻗을 때마다 땅에 걸려 투구폼이 망가지기 십상이라고 울상을 지었다.
상상했던 것보다 못한 것도 있다. 타자들과 투수들의 수준이다. 임창용은 “메이저리그 투수들은 죄다 93마일(구속 150km) 강속구와 현란한 변화구로 무장한 줄 알았다. 그러나 미국에서 직접 보니 90마일 초반대의 제구력 좋은 투수가 더 많았다”며 “타자들도 힘만 좋지, 타격 정확성은 한국, 일본과 큰 차이가 없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음식 문제도 임창용에겐 곤욕이다. 마이너리그에서 양식만 먹다 헛구역질을 하기도 했던 임창용은 경기 전 스마트폰으로 주변 한국 식당을 찾는 게 일상이다. 임창용은 “경기가 끝나고 한국 식당에서 된장찌개나 김치찌개를 먹어야 힘이 난다”며 “이러다 맛집 칼럼니스트가 되는 게 아닌지 모르겠다”고 농담을 던졌다.
임창용은 “시계를 돌려 다시 선택권이 주어져도 난 미국 도전을 결심했을 것”이라고 의지를 밝혔다. AP/연합뉴스
데뷔전에서 임창용은 14개의 공을 던졌다. 이 가운데 볼이 7개였다. 무실점으로 데뷔전을 장식하고도 임창용이 “60점 이하인 경기였다”고 평한 것도 볼이 많은 까닭이었다. 물론 2008년 일본 프로야구 데뷔전 땐 이번보다 훨씬 인상적인 투구를 펼쳤다.
“2008년 야쿠르트 유니폼을 입고 요미우리 자이언츠와 데뷔전을 치렀다. 당시 8회 등판해 오가사와라 미치히로를 외야 플라이 아웃, 이승엽을 삼진, 알렉스 라미레즈를 3루 직선타로 잡았다. 그땐 7, 8회에 등판한다는 확실한 언질이 있었기에 준비를 잘할 수 있었다.”
다음날 임창용은 주전 마무리가 부상으로 이탈하며 야쿠르트의 새로운 마무리로 등극했다. 2008년만큼은 아니지만, 2013년에도 행운의 여신은 임창용에게 미소를 보내고 있다. 데뷔전을 잘 치렀고, 현재 컵스는 확실한 셋업맨과 마무리가 부족해 경기 후반마다 고전하고 있다. 내심 마무리 보직을 노리는 임창용에겐 무혈 입성의 기회가 될 수 있다. 임창용은 “내년 시즌 중이라도 꼭 마무리로 뛰고 싶다”는 바람을 나타냈다. 이유는 ‘300’이라는 숫자 때문이다.
“한국과 일본에서 296세이브를 했다. 미국에서 4세이브만 더하면 한·미·일 통산 300세이브 기록을 달성한다.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금껏 고생한 나를 위해 꼭 ‘300세이브’라는 상장을 주고 싶다.”
# 왜 사서 고생하냐고?
임창용이 메이저리그 마운드를 밟기 전까지 많은 이가 그의 성공을 비관적으로 봤다. “마이너리그를 전전하다가 쓸쓸하게 한국으로 돌아올 것”이라는 냉정한 예상과 “일본에서 큰돈을 받고 뛸 수 있을 텐데 왜 미국에서 고생을 사서 하는지 모르겠다”는 아쉬움도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임창용은 “주변의 이야기엔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며 “시계를 돌려 다시 선택권이 주어져도 난 미국 도전을 결심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국에서 뛸 땐 늘 상대하는 타자가 정해져 있었다. 뭔가 변화가 필요하겠다 싶어 일본 무대를 노크했다. 주변에선 ‘그 돈(30만 달러) 받고 뭐 하러 일본에 가느냐’며 걱정했지만, 난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운 타자들과 싸우며 새로운 야구를 경험하고 싶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일본에서 5년간 뛰며 더는 긴장감을 느끼지 못했다. 다시 새로운 환경과 새로운 타자들을 찾아 미국에 온 것뿐이다. 요즘 들어 잠시 느끼지 못했던 승부욕이 되살아나고 있다.”
덧붙여 임창용은 “돈을 보고 도전하면 남는 건 계산기밖에 없다”며 “도전하고 성공을 거두면 내가 계산기를 두들기지 않아도 누군가 내 몸값을 결정해주게 돼 있다”고 말했다.
임창용은 앞으로의 계획을 묻는 말에 “몸이 버티는 한 마흔이 넘어도 마운드에 서고 싶다”고 답했다. 그리고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나이도 많은 만큼 컵스와의 2년 계약이 끝날 즈음 실력을 인정받으면 다른 팀으로 옮기기보단 계속 컵스에 남아 뛰고 싶다”는 속내를 밝혔다.
미국 시카고=박동희 스포츠춘추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