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의 기원’에 관한 탁월한 논문을 발표한 김달수 아시아바둑연맹 사무총장이 요즘에는 바둑룰 연구에 몰두하고 있다.
―아니, ‘바둑의 기원’ 박사 논문 준비하시는 게 아닌가요?
“논문은 맞는데, ‘바둑의 기원’은 아니고, ‘한국 바둑규칙에 대한 연구’입니다.”
―‘바둑의 기원’은 안 하시는 건가요?
“아닙니다. 계속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게 더 급한 것 같네요. ‘바둑의 기원’은 긴 호흡으로, 장기전으로 가야 할 것 같습니다. 워낙 방대한 동네라.”
―바둑 룰이나 용어의 연구·정비도 시급하다는 것에는 공감합니다만, ‘바둑의 기원’을 잠시 미루고 룰을 시작한 이유는?
“바둑이 인천 아시안게임에는 빠졌지만, 대신 올해 실내무도 아시안게임 종목으로 치러졌잖습니까. 지난해 아시안게임 준비를 시작하면서 차제에 룰도 한번 다시 살펴보자는 생각이 들더군요. 처음에는 가볍게 착수했습니다. 룰이야 기왕에 정리된 것이 있을 테니까, 혹시 문맥이 어색하거나 논리가 이상하거나 그런 부분은 없나 그냥 훑어본다는 정도였지요.”
그런데 그게 가볍게 훑어보고 넘어갈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바둑 룰은 한국 룰, 일본 룰, 중국 룰, 대만 룰, 네 가지가 있고, 그중에서 한국 룰과 일본 룰이 비슷하고 중국 룰과 대만 룰이 비슷하다. 한국-일본 룰은 집을 계산하고, 중국-대만 룰은 돌을 계산한다. 이게 지금까지의 상식이다.
“맞습니다. 물론 다 맞는 것은 아닙니다만… 또 중국 룰이나 대만 룰은 일단 차치하고, 문제는 일본 룰에는 논리적 모순이 많다는 것이고, 우리 룰과 일본 룰은 다르며, 우리 룰에도 미비점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어떻게 할 것인가. 그냥 지나갈 것인가. 지나가도 별 일은 없다. 그러나 글쎄, 이런 것도 호기심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런 걸 억누를 수 없었다. ‘바둑의 기원’을 잠시 밀어놓고 룰에 매달리기 시작했다.
―그걸 어떻게 처리하셨습니까.
“일본 룰에는 ‘착수의 권리 및 의무’라는 말이 있어요. 이상한 말입니다. 애매하게 얼버무릴 게 아닙니다. 착수는 권리입니다. 일본 룰도 ‘착수 포기’라는 말을 쓰는데, 권리를 포기하는 것이지, 의무를 포기한다는 말은 없지 않습니까. 다만 착수가 의무가 되는 경우도 상정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떤 경우에?
“분쟁이 생겼을 때입니다.”
착수를 ‘권리 단계’와 ‘의무 단계’로 구분한다는 것. 바둑이 평상시처럼 끝나면 착수도 권리 단계로 끝나지만, 분쟁이 생기면 ‘의무 단계’로 전환된다는 것. 무슨 말이냐. <참고도> 왼쪽의 ‘귀곡사’를 예로 들어보자. 백이 잡혀 있는 모습이다. 백은 A-B 어디에도 둘 수가 없고, 흑은 나중에 가령 A에 두고, 백이 따내면 오른쪽 모양이 되는데, 여기서 흑1이면 백2로 패. 그런데 “백은 둘 수가 없고 흑은 패를 만들 수 있으므로 흑의 ‘권리’를 인정해 ‘백이 잡힌 것’으로 한다”는 것, 이게 현행 룰이다.
그런데 예나 지금이나 초심자들은 무조건 잡힌 게 어디 있냐? 패로 잡아가라고 우긴다. 아니, 너는 둘 수가 없고, 나는 나중에 패를 할 수 있는 권리가 있잖아? 나는 팻감을 없애고 잡으러 갈 수 있는 권리가 있잖아? 라고 달래면, 그럼 네 집에 있는 팻감 다 없애라고 한다. 그럴 수는 없다. 내 집 안에 있는 팻감 하나를 없애는 것, 내 집 안에 내 돌을 하나 놓는 것은 내 집 1집을 줄이는 일이다.
우리 룰에 비해, 귀곡사만 놓고 본다면 중국 룰이 괜찮다. 집도 집이고 바둑판 위에 살아있는 자기 돌도 집으로 계산하는 중국 룰에서는 팻감을 없애려고 자기 집을 메우는 게 손해가 아니니까 팻감을 없애느니 마느니, 말로 다툴 필요가 없다. 바둑판 위 실전에서 해결이 된다.
여기서 김 총장은 ‘착수의 의무 단계’로 귀곡사를 해결한다.
“잡아가 보라고 우기는 사람이 분쟁을 야기한 것이지요? 그러면 그때부터 착수는 ‘의무 단계’로 넘어갑니다. 실전에서, 바둑판 위에서 해결하기 위해 분쟁을 야기한 사람부터 착수를 하라는 것, 그 사람이 먼저 착수를 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공배까지 다 둔 다음인데, 상대라고 달리 둘 데가 없습니다. 둔다면 자기 집을 메우게 되는 것이고, 상대가 자기 집을 1집 메웠으니 나도 팻감을 없애기 위해 내 집 1집을 메워도 상관이 없다, 이겁니다. 이해하시겠지요^^?”
그것 참 그럴 듯하다. 착수의 권리 단계와 의무 단계. 보통처럼 바둑을 둘 때는 착수는 권리지만, 분쟁이 일어나면 착수는 의무가 되고, 시비를 제기한 쪽에서 먼저 두기 시작해야 한다는 것.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경험하는 일들과도 어긋나지 않습니다. 민법이나 상법도 그렇거든요. 분쟁을 일으킨 사람이 먼저 증거를 제시해야 하잖습니까.”
그러면 장생은? 3패나 4패는? “동형반복 금지 조항에 대입해 생각한다”는 것만 밝히고, 다음 주로 넘긴다. 김 총장이 잠깐 쉬어가자면서 복사한 것 하나를 보여 준다. 1925년에 나온 신문기사다. “…아무개 씨가 내기바둑을 두다가 바둑돌 하나를 감추어…” 물의를 일으켰다는 내용이다.
“룰 관련된 게 없나 찾다가 발견한 건데 …순장바둑이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순장바둑에서는 따낸 돌은 다 돌려주거든요. 사석은 필요 없으니까요. 그러니 돌 하나를 숨겨 물의를 일으켰다는 것은 1920년대 중반, 이때 이미 우리도 현대바둑을 두었다는 말입니다. 우리 바둑사도 조금 고쳐 써야 할지 모릅니다. 옛날 자료는 재미있어요. 구석구석에 진실이 숨어 있어요…^^”
이광구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