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지금은 한-중-일이 바둑 세계화를 위한 협력 운운하고 있지만, 주도권 다툼이 본격화하면 어쩔 수 없이 각개 약진할 것”이며 “그때 바둑 외교전의 핵심은 결국 룰이 될 것”이라는 지적에는 설득력이 있다. 바둑 외교전에 뛰어들 생각이 없다면 모르지만, 있다면 룰의 정비는 시급한 것이다.
지난번의 주제는 ‘착수의 권리와 의무’였다. 이번 주제는 ‘동형반복’이다. ‘동형반복’은 재미있는 바둑을 재미없게 만든다. ‘동형반복’의 대표는 ‘패’인데, 단패는, 팻감을 다른 곳에 한 번 쓰고 되따낼 수 있다는 규칙으로 동형반복을 방지했다. 그러면 양패, 3패, 4패는? 양패는 단패가 두 곳에 생긴 형태이므로, 단패처럼 취급하면 된다. 3패, 4패는? 이건 팻감을 쓰지 않고 되따낼 수 있다. 이거야말로 무한 동형반복이며, 어느 한 쪽이 양보하지 않으면 무승부가 된다. ‘장생(長生)’도 마찬가지. <1도>가 지난번에 소개했던, 국내 최초, 세계 프로바둑 출범 이후 공식 대국에서는 세 번째로 나타났던 장생이다. 6월 29일, ‘20103 KB 바둑리그’, SK에너지의 최철한 9단과 정관장의 안성준 5단의 대국, 최 9단이 백이다.
백1로 꼬부리고 흑2로 젖힐 때 <2도> 백1로 먹여치자 백이 흑 대마를 오궁도화로 잡은 것 같았다. 그러나 ~ <3도> 흑1의 자살수가 있었다. 백이 <4도> 1로 따내자 <5도>가 되었고, 여기서 흑이 <6도> 1로 백 두 점을 따내자 <7도>가 되었다. 그리고 다시 백이 <8도> 1로 먹여치자 반상의 모습은 <2도> 백1 때로 돌아간 것. 다음 흑이 또 한 번 <3도> 1로 들이받자 바둑은 중단되었고 심판은 무승부를 선언했다. 그걸 어떻게 볼 것인가. 한국 바둑 룰의 정비를 위해 박사학위 논문을 준비 중인 ‘아시아바둑연맹(AGF)’ 김달수 총장의 해석은 이렇다.
“장생도 동형반복입니다. 끝이 안 나니까 무승부로 하는 것인데, 무승부는 승부의 흥미를 반감시킵니다. 따라서 팻감을 쓰고 되따내게 함으로써 단패를 동형반복에서 구원했듯이 장생도 다른 곳에 한 번 두고 오게 해야 합니다. 3패나 4패도 단패나 양패처럼 팻감을 쓰고 따내게 하면 동형반복을 피할 수 있습니다.
설명을 듣던 아마추어 한 사람이 반론을 제기했다. “<2도> 백1이 동형반복의 시발이긴 하지만, 그래도 백은 잡으러 가는 정당한 수인데 비해 흑2가 이상한 수 아닌가요. 계속 자살수를 두는 것, 나를 죽여라 하면서 계속 들이받는 행동이 곱게 보이질 않네요…. 물론 아마추어 바둑에서야 장생은 말할 것도 없고, 3패나 4패도 나오는 일이 거의 없겠지만… 이러나저러나 별로 상관도 없겠지만….”
동형반복이 끝이 없는 것처럼 룰에 관한 얘기도 끝이 없었다. 다음을 기약하면서 김 총장이 또 하나 재미난 얘기를 들려주었다.
“한-중-일-대만 룰만 있는 게 아닙니다. 미국 룰도 있고 뉴질랜드 룰도 있습니다. 미국 룰은 1943년부터 있었으니 만만치 않지요? 뉴질랜드 룰은 1980년대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미국 룰이나 뉴질랜드 룰은 아마 일본 룰의 영향도 받았을 텐데, ‘착수의 권리와 의무’에 대해서 일본 룰보다 훨씬 더 의무 쪽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 흥미롭습니다. 심지어 뉴질랜드 룰은 예컨대 접바둑에서도, 5점 접바둑이라면, 우리처럼 흑이 돌 다섯 개를 먼저 화점에 죽 놓으면 백이 두기 시작하는 게 아니라, 흑이 화점에 하나 두면 백이 백돌 하나를 흑에게 줍니다. 착수는 의무니까, 흑이 두었으니 백도 두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접바둑이어서 백이 처음부터 똑같이 바둑판에 둘 수는 없으니까, 처음에는 돌을 그냥 주는 것이지요. 즉, 교대로 착수해야 한다는, ‘착수 의무’를 이행하지 못했기 때문에 페널티(벌금)을 물어야 한다는 논리입니다…^^ 그렇게 백돌을 하나씩 모두 네 개를 준 다음, 흑이 다섯 번째 돌을 놓으면 그때부터 백도 두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뭐냐, 5점 접바둑이면 상수가 5점을 접고 덤까지 또 4집을, 9점 접바둑이면 9점에다가 덤 8집을 주는 셈이네…^^. 아무튼 복잡하다. 그래서 오히려 한-중-일은 각개 약진할 것이 아니라 ‘세계 바둑 룰’을 위해 공동연구를 해야 하는 것 아닐까. 공동연구에 당당히 참여하기 위해서도 우리 룰을 빨리 다듬어야 한다. 논리를 정교하게 다듬는 일, 정교하게 다듬어진 논리는 아름다운 것.
이광구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