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호 박사
남아프리카에서는 약 16%의 백인이 84%의 비백인(非白人)을 정치적·경제적·사회적으로 차별해 왔다. 아파르트헤이트라는 용어로 불리우는 백인우월주의에 근거한 인종차별 정책은 17세기 중엽 백인의 이주와 더불어 점차 제도로 확립되었다. 아파르트헤이트는 분리·격리를 뜻하는 아프리칸스어(語)이다.
아파르트헤이트는 1,800만의 아프리카인을 종족별로 10개 지정지에 격리·수용하고 명목상 자치권을 부여하나 실제로는 백인의 원격조정하에 이를 두는 내용의 반투 홈랜드(Bantu Homeland) 정책으로 대표되듯, 인종격리정책에 의한 인종별 분리의 발전을 추진하는 한편, 다인종사회적 현장 속에서 반투 정청법(政廳法, 1951)·유권자분리대표법(1956) 등에 의하여 유색 인종의 참정권을 부정하고, 산업조정법(1956)·패스포드법(1952)·원주민법 수정법(1952)·이인종 혼인금지법(1949)·집단지역법(1950) 등에 의하여 경제적·사회적으로 백인의 특권을 유지,강화하였다.
이러한 아파르트헤이트로 인해 국제사회의 비난을 일어나고, 1976년 6월의 소웨토(요하네스버그 주변의 흑인집단거주지역) 폭동 이후 아프리카인을 중심으로 하는 남아공 내 유색인종의 투쟁은 더욱 고조되었다.
넬슨 만델라는 1944년부터 아프리카민족회의(ANC)에 참여했고, 이후 흑인해방운동의 지도자가 되었다. 통행법 반대 투쟁으로 유명세를 얻은 그는 백인정권의 탄압이 강화되자 지하로 도피해 투쟁을 일으키고 게릴라전을 계획하기도 했다. 1964년에 열린 리보니아 재판은 만델라에게 종신형을 선고했으며 만델라는 18년간 케이프타운 앞바다의 로벤섬, 그 뒤엔 삼엄한 경비로 악명 높은 폴스무어 교도소에 감금됐다.
남아공의 지배권력은 만델라를 가둠으로써 흑인들의 투쟁의지를 꺾으려 했으나 만델라의 이야기는 세계의 양심세력에 깊은 감명을 주어 1982년 이후 전 세계적으로 만델라 석방운동이 전개되었다. 결국 남아공은 1990년 2월 11일 만델라를 석방하였고 넬슨 만델라는 아프리카민족회의 부의장이 되어 1991년 9월에는 폭력사태에 대해서 우려를 표하며 평화적으로 문제해결을 도모한다는 내용의 민족평화협정(National Peace Accord)에 서명했다.
넬슨 만델라는 백인정부와 협상하여 350여 년에 걸친 인종분규를 종식시킨 공로로 1993년 데클레르크 대통령과 공동으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만델라는 1994년 4월 27일 남아프리카공화국 최초의 흑인 참여 자유총선거에 의하여 36개의 분파로 구성된 다인종 의회에서 대통령에 선출되었고 마침내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아파르트헤이트는 종결되었고 350여 년에 걸친 인종분규를 종식시켰다. 그는 1999년 퇴임할 때까지 인종차별 폐지를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였고 그는 흑백이 공존하는 무지개 국가를 구현했다.
다문화국가에서 인종 간 문화 간 화합을 어떻게 이루는가는 그 국가 최대의 과제이다. 만델라의 개인적인 숭고한 노력과 무지개국가로 대표되는 그의 인종화합사례는 다른 국가들에게 소중한 교훈이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