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부터 이세돌 9단, 구리 9단
‘좀 그렇기’는 박정환 9단도 마찬가지. 서너 달 전부터 서열 1위에 오르내리고 있는데, 랭킹에 비해서는 아직까지 뭐 이렇다 할 굵직한 한 방이 없다. 게다가 요즘 타이틀 일선에서는 우물쭈물하고 있다는 이세돌 9단인데, 그런 이 9단에게 졌다. 박 9단으로서는 지금 이 9단을 넘어서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 9단 너머에 도열해 있는, 날마다 새로 나타나고 있는 중국의 어린 후배들을 상대하는 것이 발등에 떨어진 불이다. 여기서 머뭇거릴 시간이 별로 없다.
이 9단은 25일 베이징의 킹위엔루이팅호텔로 날아간다. 하는 건지, 안 하는 건지 소문이 무성했던 이세돌-구리의 10번기가 드디어 막을 올린다. 26일 제1국을 시작으로 이후 매달 마지막 일요일에 한 판씩 둔다. 스케줄에 변동이 없고 10판을 다 두게 된다면 10월에 가서야 끝나는 장기전이다. 누구든지 먼저 6승을 올리면 끝나는 것으로 했으니 물론 10월까지 안 갈 수도 있다.
이긴 사람은 500만 위안의 상금을 받는다. 우리 돈으로 약 8억 7000만 원. 세계 바둑사상 최고의 상금이다. 진 사람은 20만 위안, 약 3500만 원. ‘약간의 위로금+오고가는 경비’라고 한다. 그것도 적은 건 아니겠지만, 우승 9억 원에 비할 때 그걸 준우승 상금이라고 말하기는 쑥스러운 것. 이를테면 승자독식, 전부 아니면 전무다. 진정한 프로의 승부이긴 하다. 만약 대국결과가 5승 5패로 비기게 되면 상금도 절반씩 나누어 갖게 된다.
아무튼 상금 규모로는 ‘세기의 승부’라는 것에 이의가 없지만, 내용으로는 앞서도 한두 번 지적했듯, 10번기 개막 소식에 대한 바둑계 인사들의 어제 오늘 반응도 그렇듯 ‘세기의 승부’라고 하기에는 어색한 구석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우선 이세돌 9단과 구리 9단은 지금 세계 1-2등이 아니다. 이 9단은 한국 랭킹 3위, 구리 9단은 중국 랭킹 4위다. 10번기는 일반적인 말이 아니다. ‘역사적 술어’다. 당대 제일을 자부하는 두 사람이 하늘에 해가 둘일 수 없으니, 서로의 모든 걸 걸고 천하제일검을 가리자는 승부다. 진 사람은 치수가 고쳐지는 수모를 당해야 한다. 그걸 못 견디겠으면 떠나는 거다.
이세돌-구리 10번기에서 구리 9단이 지면 치수가 고쳐질까. 다음에 이세돌 9단과 구리 9단이 만나면 구리 9단이 이 9단에게 선으로 들어가나. 이세돌이 지면 은퇴하나. 그런 일을 없을 것이다. 두 사람은 세계대회에서 적어도 당분간은 계속 만날 것이고, 호선으로 둘 것이며 10번기에서 진 사람이 10번기에서 이긴 사람에게 이길 수도 있고 또 질 수도 있다. 10번기에서 진 사람이 세계대회에서 우승할 수도 있다. 또 이 9단과 구리 9단은 평소엔 친구다. 바둑을 둘 때는 치열하게 싸우지만, 바둑이 끝나면 같이 술을 마시고 인터뷰 같은 데에서는 반갑게 악수를 나누며 서로 칭찬을 한다. 그건 좋은 풍경이니 뭐라고 할 수 없다. 그런데 그러면 굳이 10번기라는 ‘역사적 술어’를 빌릴 것도 없다. 어쨌든 이벤트로서의 효과는 클 것이라는 얘기도 있으나 다른 의견도 있다.
“흥행에 성공할지, 어느 정도로 성공할지 모르겠다. 요즘 바둑대회가 얼마나 많은데, 연일 10대 세계 챔피언의 뉴스가 쏟아지고 있는데, 전성기를 지난 것으로 보이는 두 사람이 한 달에 한 판 두는 걸 팬들이 얼마나 관심을 갖고 기다릴 지, 모르겠다.”
“그렇다. 이번 10번기 우승 상금이 10억 가깝다고 하지만, 삼성화재배나 LG배는 이미 옛날에 시작할 때부터 예산이 15억, 20억 하지 않았나? 그에 비해 10번기 같은 걸 하면 재미가 덜한 예선 본선 생략할 수 있고, 비용도 덜 들어가고, 기업들 입장에서는 달리 생각할 수도 있겠다.”
“중국은 명분이나 이유가 있을 것이다. 구리 9단은 ‘충칭(重京)의 별’이다. 중앙 정부에서도 구리 9단을 좋아하는 건 당연하다. 그러니까 구리 9단을 위해 뭔가 해 주고 싶을 것이다. 우리는 거기에 찬조 출연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의미는 있다. 흥행의 요소도 충분하다. 1983년생, 1995년 입단, 둘이 똑같다. 타이틀 숫자는 이 9단이 41회, 구리 9단이 40회, 엇비슷하다. 둘 사이의 전적은, 비공식 대국까지 포함하면 이 9단이 18승1무17패, 공식 대국만 따지면 구리가 17승1무16패. 난형난제다. 바둑판에서는 난형난제, 바둑 밖에서는 호형호제, 그럴 만하다.”
“한 번도 정상에 선 적이 없는 사람들이라면 모를까, 지금은 정상에서 잠시 내려와 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한때 꽤 오래 세계 바둑을 주름잡았던 영웅들이다. 바둑 스타일도 두 사람 다 멋지지 않은가. 구리는 대범하고 시원시원하고, 프로기사 정상급이라면 당연한 것이기도 하겠지만, 특히 깊은 수읽기는 인상적이다. 생긴 것도 훤하고 매너도, 깨끗하고, 한마디로 군자의 풍도가 있다.”
“이 9단은, 옛날에 서봉수 9단을 ‘야성의 표범’이라고들 불렀지만, 이 9단이야말로 머리 스타일부터 바둑 스타일까지가 ‘야성의 표범’이다. 바둑을 이 9단만큼 다이내믹하게 두는 사람도 드물다. 요즘은 한국이나 중국에서 바둑을 이세돌 비슷한 스타일로 두는 후배들도 많지만, 발상의 기발함이라고 할까, 천의무봉이라 할까, 그런 점에서는 여전히 이 9단이 발군이다. 진정한 의미에서 천재라는 말에 가장 가까운 기사다.”
그런데 사실은 우리나라에도,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외국 기업이 후원하고, 우리나라 사람이 주인공이 참여했던 10번기가 이미 30년 전에 있었다. 그걸 다음호에 소개한다.
이광구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