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국적으로 소치올림픽에 출전하는 안현수가 최근 최고의 기량을 선보이고 있다. 사진출처=러시아빙상연맹
빅토르 안은 안현수의 러시아명이다. 안현수는 2006 토리노동계올림픽 3관왕을 차지한 한국 남자 쇼트트랙의 영웅이다. 최근 해설자로 변신한 미국 쇼트트랙 간판스타 안톤 오노가 NBC 스포츠와의 인터뷰에서 “안현수는 쇼트트랙 기술에 있어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스케이트 선수”라고 극찬했을 정도로 쇼트트랙에서는 황제로 통한다.
그러나 안현수는 한국에서는 폐위된 황제다. 토리노 대회 이후 빙상연맹과의 갈등, 파벌싸움, 소속팀 해체, 부상 등에 휘말리며 고국을 등질 수밖에 없었다. 결국 안현수는 지난 2011년 국가대표선발전에서 탈락한 뒤 러시아로 귀화한 어둠의 역사를 품고 있다.
안현수가 떠난 한국 남자 쇼트트랙은 최대 위기의 시대를 맞았다. 에이스 부재에 시달리며 국제대회를 거듭할수록 하향세를 걸었다. 한국은 신다운 이한빈 박세영 이호석이 태극마크를 달고 소치올림픽 금메달에 도전한다. 떠오르는 에이스 신다운과 이한빈의 선전에 기대를 걸고 있다. 악재도 겹쳤다. 5000m 계주에 출전할 예정이었던 노진규가 갑작스런 부상으로 제외되면서 이호석을 긴급 수혈했다. 최상의 전력을 갖추지 못하고 올림픽에 나서야 하는 상황이다. 또 최근 불거진 ‘성추행 파문’으로 분위기마저 어수선하다.
한국의 경계 대상 1호인 러시아 남자대표팀과는 정반대의 상황이다. 안현수가 이끄는 러시아는 최상의 컨디션으로 대회를 앞두고 있다. 안현수는 지난 20일 독일 드레스덴에서 열린 2014 유럽쇼트트랙선수권대회에서 4관왕에 오르며 종합 우승을 차지했다. 올림픽 최종 리허설에서 황제의 귀환을 알린 완벽한 부활이었다.
러시아에서 안현수에 대한 기대감은 대단하다. 그러나 부담은 없다. 이미 러시아 쇼트트랙의 수준을 몇 단계 올려놓은 안현수의 헌신만으로도 러시아의 안현수에 대한 평가는 하늘을 찌른다. 소치올림픽 메달 획득은 보너스인 셈이다. 그런데 유럽선수권 싹쓸이 4관왕으로 올림픽 다관왕 가능성을 높이면서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다.
안현수의 최근 스케이팅 모습은 놀랍다. 전성기였던 토리노 대회 당시보다 오히려 기량이 더 발전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체력적으로도 보강이 된 막판 스퍼트의 폭발력은 여전하고, 스타트에서도 힘이 더 붙었다. 500m 단거리뿐 아니라 1000m, 1500m 중장거리에서도 금메달 후보로 손꼽히는 이유다.
러시아 국적으로 귀화한 안현수(위)와 안현수를 지도했던 황익환 전 성남시청 감독.
황 전 감독은 유럽선수권에서 안현수의 모습을 보고 소치올림픽에서의 금메달 획득을 확신했다. 황 전 감독은 “안현수가 더 발전한 것은 사실이다. 유럽선수권에서 스케이트를 타는 것을 보니까 컨디션이 다 올라왔다. 금메달 1개는 확실하고 전종목 메달도 딸 수 있을 것이다”라고 내다봤다.
안현수의 부활 비결이 뭘까. 기량 발전 이유는 특별한 것이 없었다. 황 전 감독은 “단지 훈련 방법이 바뀌었을 뿐”이라고 했다. 체력 위주의 훈련이 아닌 짧은 코스의 파워를 끌어올리는 데 중점을 둔 것이 큰 효과를 봤다는 것이다. 황 전 감독은 “한국은 훈련량이 엄청나다. 안현수는 한국에 있을 때보다 50% 이상 적게 훈련했다. 운동량을 조절하며 양보다 질적으로 훈련 방법을 바꿨다. 효과는 더 좋았다”고 분석했다.
그리고 또 하나, 심적인 변화도 큰 몫을 차지했다. 한국에서 운동 외적인 스트레스에 시달렸던 안현수의 마음이 편해진 것이다. 황 전 감독은 “러시아에서는 메달의 색깔이 중요하지 않다. 금메달을 따면 더 좋겠지만, 금·은·동에 상관없이 메달 자체를 따는 것에 같은 의미를 둔다. 당연히 안현수도 부담을 덜 수 있는 배경이 만들어지는 것이다”라고 했다. 이어 “즐겁게 운동을 하는 것이 효과를 더 낼 수 있는 이유”라고 강조했다.
안현수의 적수는 많지 않다. 한국 대표팀과 캐나다의 찰스 해믈린 정도다. 안현수가 실수 없이 결승에 오른다면 전관왕에 도전할 수도 있다. 한국으로서는 안현수가 버티는 러시아 대표팀을 경계할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러시아는 소치올림픽 개최국이다. 스케이트는 빙질에 따라 성적이 갈릴 수 있는 민감한 스포츠다. 그만큼 현지 적응이 중요하다. 소치에서 훈련 경험이 풍부한 안현수가 절대적으로 유리하다. 러시아 홈팬들은 물론 안현수를 잊지 못하는 한국 팬들의 응원도 큰 힘이 될 전망이다.
빙상연맹은 초비상이다. 한국의 성적이 저조할 경우 책임론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여기에 ‘안현수 역풍’까지 더해져 여론의 비난이 쇄도할 것이 불 보듯 뻔하다. 안현수와 빙상연맹의 갈등에 애꿎은 한국 쇼트트랙 선수들은 부담과 압박까지 어깨에 얹고 있다. 빙상연맹이 자초한 얄궂은 운명의 키는 안현수가 쥐고 있다. 인생지사 새옹지마다.
서민교 MK스포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