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화가 지난 11일(현지시간) 스피드스케이팅 여자 500m 1차 레이스에서 역주하는 모습. 연합뉴스
# “꿀벅지에 정신력까지…”
소치 올림픽 한국 선수단엔 그야말로 ‘여풍’이 불고 있다. 모태범과 이승훈이 메달권 밖으로 벗어나는 등 남자 선수들이 고전하는 반면, 여자 선수들은 기대만큼의 활약으로 선수단을 이끌고 있다. 지금 추세라면 올림픽이 끝날 때 ‘소치는 여성 시대!’라는 헤드라인도 나오지 않을까. 대표적인 선수가 바로 이상화다. 그가 지난 11일 벌인 500m 레이스는 ‘멘탈갑’ 이상화의 면모를 느끼기에 충분했다.
이상화는 지난해 10~12월 열린 월드컵에서 7차례 출전해 7번을 모두 우승했다. 때문에 전세계 언론이 이상화의 소치 올림픽 우승을 예상했다. 올림픽은 만만한 무대가 아니었다. 이승훈과 모태범 등 밴쿠버에서 함께 금메달을 땄던 동갑내기 남자 선수들이 줄줄이 고배를 마신 데다, 1차 레이스에서 함께 뛰는 선수의 실력이 떨어지는 악재까지 맞은 것이다. 이상화 어머니 김인순 씨는 딸이 금메달을 거머쥔 뒤 “사실 한국 선수단에 메달이 나오지 않아 상화가 부담을 더 느낀 것은 사실이었다”고 살짝 고백하기도 했다. 게다가 홈 링크의 올가 파트쿨리나(러시아)가 1~2차 레이스에서 괴력을 발휘하며 좋은 성적을 낸 탓에 2차 레이스 맨 뒷 조에서 뛰는 이상화의 압박감은 가중됐다. 그러나 이상화는 자신이 선호하는 아웃코스가 아닌 인코스에서, 1차 레이스보다 더 좋은 성적을 내고 러시아 관중들의 금메달 기대를 한순간 무너뜨렸다.
“1차 레이스 끝나고 자전거를 타는데 눈물이 나더라고요. 지금까지 내가 노력했던 것들이 스쳐지나가면서 울컥했죠.” 이상화는 그렇게 눈물이 많은 여자다. 하지만 출발선 앞에 서면 그 누구보다 강한 정신으로 자신의 실력을 100% 발휘한다. 크로켓 코치는 오른쪽 검지로 자신의 머리를 가리키면서 “신체는 모든 선수가 훌륭하다. 이상화의 강점은 바로 멘탈”이라고 강조했다.
우승을 확정한 뒤 케빈 크로켓 코치의 축하를 받는 이상화. 연합뉴스
쇼트트랙과 컬링 대표팀은 또 어떤가. 쇼트트랙 박승희는 13일 여자 500m에서 결승을 치르기 전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앞서 열린 남자 5000m 계주에서 남자 대표팀이 넘어지는 바람에 결승 진출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남자 대표팀엔 그의 연인 이한빈과 동생 박세영이 함께 뛰고 있다. 결국 결승에서도 영국의 엘리스 크리스티가 무리하게 인코스로 끼어들다 박승희와 아리아나 폰타나(이탈리아)를 넘어뜨리는 사고를 쳤다. 그러나 박승희는 그 와중에도 ‘빨리 뛰어야지’란 마음으로 레이스를 완주했고 동메달을 손에 쥐었다. 억울할 법도 했지만 그는 “우리가 약한 단거리에서 나온 메달이라 값지다. 나보다 영국 선수가 펑펑 울어 마음이 짠하다”며 예쁜 마음씨도 드러냈다. 그는 믹스트존(공동취재구역)에서 취재진을 만났을 때 눈물을 쏟아냈다. 동메달이 아쉬워서 그런 게 아니라 엄마 생각이 나서 그랬단다. “앞에서 누가 가족 얘기를 물어보더라고요. 그 얘기하니까 그냥 눈물이….” 경기가 끝난 뒤 그는 다시 여자로 돌아갔다.
여자 컬링 대표팀도 그랬다. 올림픽 첫 경기, 그것도 한일전을 12-7로 크게 이기며 부담을 이겨냈다. 팀의 핵심 역할인 스킵 김지선이 흔들려 일본전 승리 뒤 2연패를 당했으나 선수 5명이 똘똘 뭉쳐 개최국 러시아를 잡았다. 맏언니 신미성의 희생이 있어 가능했다. “분위기 쇄신을 위해 내가 물러났죠.” 경기에 못 나서는 언니의 속은 얼마나 쓰릴까. 하지만 그는 웃으며 후배들 도우미 역할을 자청했다. 동생들은 “중간 중간 힘들었지만 미성 언니를 생각하며 이를 악물었다”고 말했다. 러시아전이 끝난 뒤엔 컬링 대표팀 선수들의 눈가에도 눈물이 촉촉히 맺혔다.
# 심석희-김연아가 만드는 ‘여성 시대’
지난 10일 쇼트트랙 여자 3000m 계주 준결승에서 박승희(오른쪽)가 심석희를 힘껏 밀어주고 있다. AP/연합뉴스
김연아는 소치올림픽을 끝으로 현역 생활을 마무리 짓는다. 작은 사진은 대한민국선수단 결단식에 참석한 ‘빙판 위의 두 여왕’ 이상화, 김연아 모습. 연합뉴스
아사다가 완벽에 가까운 연기를 펼칠 때, 김연아가 더 완벽한 연기로 제압한 경우를 우린 밴쿠버에서 봤다. 김연아가 완벽한 연기를 선보인 뒤 아사다가 심리적으로 흔들려 비틀거린 장면 역시 밴쿠버에서 봤다. 그게 바로 김연아, 그리고 한국 여성의 힘이다. 경기가 끝난 뒤 울음을 쏟아내더라도 경기 도중엔 굳은 심지로 목표를 일궈내는, 뭔가 말로 표현하기 힘든 한국 여성들의 정신력이 낯선 땅 러시아 소치에서도 발휘되고 있다.
김현기 스포츠서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