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채영 초단(왼쪽)과 박지은 9단.
이번 박지은-김채영의 3국은 사실은 박지은이 이긴 바둑이었다. 바둑이 정상적으로 끝났으면 박지은이 반면 9집, 덤을 내고도 2집반을 이기는 것이었는데, 마지막 반패 자리를 처리하다가 자충을 두어 버렸고, 흑돌 18개가 떨어져 나간 것. 구경하는 사람들이나 당사자들이나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해프닝이었다.
<1도>가 그 장면이다. <2도> 흑1로 메우고 백2로 따냈다. 남은 것은 A-B-C의 반패 3개. A와 B는 흑이, C는 백이 따낼 수 있는 곳. 서로 하나씩 잇고 마지막 반패만 다투다가 어느 한 쪽이 이겨 이으면 끝. 흑이 둘 차례.
<3도> 흑1로 이었다. 이게 자충이었다. 김채영의 손길이 멎었다. 김채영이 고개를 숙였다. 뭔가를 생각하는 것 같았다. 표정이 밝지 않았다. 그 시간이 몇 초쯤이나 되었을까. 김채영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흑돌 열여덟 점을 들어냈다. 박지은은 처음에는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분간이 안 가는 것처럼 보였다. 그 시간이 또 몇 초나 되었을까. 박지은이 빠르게 돌을 쓸어 담고 조용히 일어섰다. 복기는 물론 없었다.
공배를 메울 때도 주의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는 공배도 집이라 조심조심 메우는 훈련을 하게 되는 중국 룰이 괜찮다. 공배 메우다 사단이 터지는 것은, 프로 동네에서도 아주 가끔이기는 하지만 있다는 것, 그게 묘하다.
<4도>를 보자. 지금으로부터 12년 전, 2002년 2월 20~21일. 일본 홋카이도의 어느 온천. 일본 바둑 최고의 타이틀, 제26기 기성전 도전7번기 제5국. 타이틀 홀더는 대만 출신의 왕리청 9단. 도전자는 류시훈 9단(당시 8단).
류시훈은 예전에 이창호와 함께 연구생으로 수련하다가 1986년 이창호가 먼저 입단하자, 바로 일본에 건너가 수업하면서 프로기사가 되었고 1996년 린하이펑(임해봉) 9단으로부터 랭킹 5위의 제20기 ‘천원’, 1998년 왕리청 9단으로부터 랭킹 6위의 ‘왕좌’를 빼앗은 후 드디어 정상 정복에 나선 것이었다(요즘은 타이틀 서열이 좀 바뀌었다. 종전의 기성-명인-본인방-십단-천원-왕좌-‘작은 기성’에서 ‘빅3’는 변함이 없고 4위였던 십단이 7위로 후퇴했고 6위였던 왕좌가 4위로 올라왔다). 류 9단은 이창호보다 네 살 위다.
도전 1국은 놓쳤으나 2-3국을 연승했고 4국에서 져 2 대 2 동률. 바둑을 다 둔 모습. 류시훈이 흑. <4도> 흑1로 반패를 잇는 것으로 종국이다. 백2 이하는 모두 공배. 그러나 백6은 공배지만, 흑을 단수친 수였는데 류시훈은 7자리를 메웠고, 왕리청은 8로 흑돌 여섯 개를 들어냈다. 입회인 이시아 요시오 9단이 대국장으로 들어와 자초지종을 물었다. 류시훈은 “다 두었지요?”라고 종국 동의를 구했다고 말했고 왕리청은 “듣지 못했다”고 대답했다. 종국에 합의한 상황이었다면 백8은 무효다. 동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흑은 할 말이 없다.
반면으로 10집을 이겨 있던 류시훈은 돌을 거두었고, 3월 6~7일의 6국도 2집반을 져 종합전적 2승4패로 등정에 실패했다. 5국을 그런 식으로 지고 6국을 이기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이후 류시훈은 타이틀 일선에서 시나브로 멀어져 갔다.
<5도>는 2013년 12월 15일, 한국기원에서 벌어진 이세돌-최철한의 제41기 하이원리조트배 결승5번기 제5국.
두 사람은 서둘러 공배를 메워갔는데, 이 9단이 백7의 단수를 아차, 무시(^^)하는 바람에 바둑판은 <6도>처럼 변할 상황이 되었다. <6도>가 나타나기 전에 이 9단이 돌을 거두었다. 정상적으로 계가해 보니 최 9단이 1집반을 이기고 있었다. 타이틀을 결정하는 단판승부. 역전에 역전을 거듭하다 종당에는 반집으로 요동치던 국면을 달려오느라 잠깐 시야가 흐려졌던 것. 그러나 그게 아니더라도, 이 9단은 계가 전에 패배를 알고 있었을 터이니 박지은이나 류시훈에 비할 일은 아니다.
박지은이 공배를 메우다 타이틀을 잃고, 700만 원을 놓친 날(우승 1200, 준우승 500) 한국기원에서는 사건 자체가 화제가 되었을 뿐, 진 건 진 거고 이긴 건 이긴 것이어서 그 당연한 결과에 대해 옳으니 그르니 하는 것은 없었지만, 인터넷 바둑 사이트는 “프로니까 당연하다”와 “프로라도 이건 아니다”라는 찬-반 양론으로 종일토록 소란했다. 갑론을박이 치열했는데, 그 와중에 “일단 상금부터 좀 올려놓고 얘기하자”는 일갈이 댓글창에 웃음을 선사했다.
박지은 9단은 어이가 없고, 김채영 초단도 편치는 않을 것이지만, 아무튼 “프로는 자기관리도, 대국시간에 늦지 않게 오는 것도 실력이고, 실수도 실력. 천재지변을 빼고는 모든 게 실력”이라고 하니 변명-논란의 여지는 없다.
다만 50년쯤 옛날에는 이런 일도 있기는 있었다. ‘본인방 9연패’에 빛나며 ‘모착의 달인’으로 불렸던 다카가와 가쿠(高川 格) 9단과 린하이펑(林海峰) 9단의 대국이었는데, 형세를 리드하던 다카가와 9단이 린 9단의 승부수에 숙고하다가 돌연 쓰러진 것. 구급차가 오고 다카가와 9단이 병원으로 실려 가고 하는 황급한 상황이었다. 바둑은 당연히 린하이펑의 기권승(불계승)으로 처리되는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린 9단이 조용히 기록자에게 말했다. “다카가와 선생이 쓰러지기 전에 둔 수가 최종수이고 거기서 내가 돌을 거둔 것으로 하세요.”
이광구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