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지방선거에서 전국 각 지역에 출전한 ‘비(非)박근혜’ 쪽 후보들이 선전하면서 여의도 정가가 ‘비박의 선전’을 이야기하고 있다. 확정된 광역단체장 후보에다 경선 과정 중인 예비후보까지 비박계 인사들이 치고 나오는 형국이어서 “이러다간 친박 주류의 당내 권력지형이 바뀔 수도 있다”는 진단이 나왔다. 전국 각 ‘지방장관(광역지방자치단체장)’을 비박계가 점령(?)해버리면 국정운영 속도를 한껏 내야 할 현 정부가 혹여 가시밭길을 걸을 수도 있다는 해석이다.
서울시장에 나선 정몽준 의원과 경기지사에 출마한 남경필 의원. 이들은 비박계 잠룡급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하지만 이런 비박의 선전을 다른 시각으로 보는 쪽도 적지 않다. 이변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곳에서 여권 실세들이 그린 ‘큰 그림’대로 흘러가고 있다는 이야기다. 정치권 사정에 밝은 여권 관계자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원활한 흐름을 보여야 할 국정운영 고속도로에 차로를 점령하거나 서 있거나, 급기야는 역주행까지 했던 인사들이 대거 빠져나갔다. 지금 당에 남아 있는 분들을 봐라, 친박계 일색이지 않은가. 껄끄러운 비박계 인사들이 광역단체장으로 가는 국도로 우회했고, 도로가 비었다. 도로가 뻥뻥 뚫렸다. 누가 속도를 내는지만 남은 것 아니겠는가. 친박계 내부의 권력지형 재편이 시작된 것과 같다. BH(청와대)나 여권 실세들이 지방선거를 통해 여권 지형의 큰 그림을 그린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해석이 나온다.”
지방장관 탈환에 나선 인사 중 선전하고 있는 이들에겐 공통점이 있다. 비박계에다가 잠룡급으로 불리는 대중적인 인물들이란 점이다. 서울시장에 나선 정몽준 의원(7선)에다 경기지사 후보군 중 두각을 보이는 남경필 의원(5선)과 그를 좇는 정병국 의원(4선), 새누리당 후보로 확정된 원희룡 전 의원이나 홍준표 경남지사 등은 모두 박근혜 대통령과 각을 세우거나 척을 진 경험이 있다. ‘배신의 트라우마’가 강한 박 대통령으로선 그 스타일상 이들을 포용하기는 어렵다.
앞서의 여권 관계자는 “당원과 대의원 누가 단체장 말을 듣겠는가. ‘딴죽족’을 여의도에서 다 솎아낸 것과 같다. 당-청이 매끄러운 관계를 더욱 견고히 하는 일만 남았다”고 덧붙였다. 지방선거를 분기점으로 비박계 등 떠밀기를 통해 친박계가 ‘여의도 점령’ 시나리오를 쓴 것 아니었냐는 이야기가 나오는 대목이다. 중립 성향의 새누리당 의원은 이런 말을 해줬다.
“아무리 선수가 높은 국회의원 출신이라 해도 시·도지사가 되면 을의 처지가 될 수밖에 없다. 각종 공약에서부터 정책까지 국회의 예산안 통과 없이는 시행하기가 어렵다. 재정이 열악한 광역단체일수록 집권 여당의 ‘갑질’ 앞에 굽실거려야 한다. 사실상 서울시장 정도를 빼면 광역단체장이 집권 여당의 권력구도에 개입할 여지는 없는 것과 같다.”
결국, 이들 비박계 광역단체장이 대거 당선되면 비박계의 파워와 영향력이 입증되면서 당장 7·14 새누리당 전당대회에 영향력을 끼칠 것이란 분석은 ‘아니올시다’란 것이다. 친박계는 우선 5월 원내대표 경선에서부터 원내권력을 친박이 이어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교통정리는 잘 돼 있다.
가장 앞서 있었던 이주영 의원이 해양수산부 장관으로 빠졌다. 친박계 내 대표적인 쓴소리꾼인 유승민 의원은 원내대표 출마설에 “절대 안 한다”고 선을 그은 상태다. 비주류에선 심재철 최고위원의 출마설이 나오지만 ‘본회의 누드사진 검색’ 상처가 크다. 반면 이완구, 정갑윤, 유기준 의원 등 원내대표 주자군은 모두 친박계다. 변수는 상대방인 새정치민주연합. 저격수 내지는 ‘똑순이’로까지 불리는 박영선 의원의 도전 가능성이 커지며 “지금 있는 새누리당 후보군으로 그녀를 감당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유 의원 이야기가 다시 회자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왼쪽부터 원희룡 전 의원, 홍준표 경남지사.
결국 친박계 주류 핵심이 비박 인사들은 내쳤을지 몰라도, 당내 절대다수인 초선의 범친박 비주류 내지는 친박이었지만 현재는 중립 성향의 의원들, 이른바 ‘입박현중(入朴現中)’이 뜻대로 움직이지 않을 공산이 있다. 여권 분위기를 잘 아는 한 핵심 인사는 이런 관측을 내놨다.
“친박계 핵심도 아니고 친이계나 비박계도 아닌 다수 초·재선 의원들은 당-청 관계나 당권, 원내권력에 관심이 없다. 오로지 ‘다음 총선에 내가 공천을 받아 당선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만 생각한다. 그러려면 당 지지도가 살아 있어야 한다. ‘여당이 제 목소리를 내며 BH를 견제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쪽과 ‘대청와대 파트너십이 원활하도록 친박을 밀어야 한다’는 쪽으로 나뉘게 될 것이다. 그 첫 가늠자가 지방선거 결과가 아니겠는가. 새누리당이 예상보다 고전하면 비박계 주자(김무성)가, 선전하면 친박 주자(서청원, 최경환)의 당권 쟁취가 점쳐진다.”
BH와 여당의 실세가 비박계 교통정리에 성공했더라도 지방선거 결과에 따라 시나리오를 고쳐 써야 할 가능성이 있다. 특히 대선주자급 당권주자가 없다는 점에서 친박계 내부의 권력투쟁도 점쳐진다. ‘쟤도 하는데 나라고 못할쏘냐’는 분위기가 확산될 가능성이 있다.
박근혜와 가깝다고 해서 난제가 해결되던 시대는 종말을 예고하고 있다. 당 사무총장까지 지낸 서병수 의원은 박근혜 후광효과에도 부산시장 경선에서 고전하고 있다. 온두라스 특사로까지 다녀왔지만 옛 친이계인 권철현 전 주일대사와 박빙구도다. 안전행정부 장관을 접고 인천시장에 출마한 유정복 의원도 안상수 전 시장과의 경쟁에서 애를 먹고 있다. 대구에선 친박계 서상기, 조원진 의원이 지지율 난관에 봉착해 있다는 전언이다.
선우완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