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제공=삼성 라이온스
김기태 감독의 사퇴는 한화 정근우와 LG 정찬헌의 빈볼 사건 이후 대구 원정 경기 중에 벌어졌다. 그래서 일부는 김 감독의 사퇴 이유를 ‘빈볼 사건 때문’이라고 얘기했고, 정찬헌에게 빈볼을 지시한 것으로 알려진 이병규에게 그 화살이 돌아갔다. 즉 김 감독이 이병규의 빈볼 지시에 낙담했고, 그 후 지인들에게 자신이 책임을 지고 물러나야 할 것 같다고 얘기했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이 부분은 사실과 다르다는 게 구단관계자, 선수들의 입장이다. 먼저 빈볼 사건의 배후가 이병규가 아니라는 점과 김 감독은 한화와 벤치클리어링이 일어난 일에 대해선 경기의 일부분으로 받아들였다고 한다. 문제는 벤치클리어링이 벌어진 다음날 대구에서 LG 선수단 전원이 삭발을 했고, 삭발 후 경기장에 나타난 선수들의 모습에 김 감독이 크게 충격을 받았다는 후문이다.
LG 구단의 한 관계자는 “감독님이 선수들이 머리를 깎은 모습을 보시고선 정말 마음 아파하셨다.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 선수들이 창피스런 일을 겪는다며 자책하셨다”라고 전한다. 즉 빈볼로 이어진 선수단 삭발은 김 감독 사퇴의 결정적인 이유는 아니었다. 그러나 마음을 먹는 데 어느 정도의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 프런트와 갈등이 있었다?
김 감독의 사퇴 소식이 알려진 후 이종범 한화 코치는 그 배경에 대해 얘기를 풀어가다가 “기태 형은 지난 시즌 이후에도 그만두려 했었다”라고 말했다. 지난 시즌 LG는 11년 만에 포스트시즌에 진출하는 쾌거를 이뤘다. LG 트윈스를 상징하는 ‘유광점퍼’가 불티나게 팔렸고, ‘가을야구’에 목말라했던 LG 팬들은 잠실야구장을 점령하며 뜨거운 응원전을 펼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 감독이 시즌 종료 후 구단에 사표를 제출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이에 대해 한 야구관계자는 당시의 상황에 대해 다음과 같은 얘기를 전한다.
“LG가 지난해 5월 부진의 늪에 빠졌을 때 프런트에서 김 감독의 후임자를 찾고 있고, 실제로 A 감독과 직접 접촉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당시 김 감독은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었다. 평소 그의 성격대로라면 당장 사표 쓰고 팀을 떠났겠지만, 주변의 만류로 감정을 추슬렀고, 6월 들어서면서부터 LG가 돌풍을 일으키며 치고 올라가는 바람에 김 감독의 거취 문제는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그러나 김 감독으로선 당시의 기억을 결코 잊지 못했다. 지인들을 만날 때마다 그 얘기를 곱씹으면서 마음을 다잡지 못한 적이 많았다고 한다. 그러다 문제가 터진 곳은 미국 애리조나에서였다. 지난 시즌 중 신장 종양제거수술을 받은 차명석 전 LG 코치와의 계약을 앞두고 구단이 뜨뜻미지근한 행보를 보이다 선수단이 스프링캠프를 떠난 이후 구단에서 차 코치의 사임을 발표하자, 애리조나의 김 감독은 노발대발했고, 결국엔 선수단 훈련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것으로 불편한 심기를 대신했다고 한다.
한 방송 해설위원은 “김 감독은 차명석 전 코치에게 마음의 빚이 있었다. 신장 수술을 받는 차 코치를 향해 ‘내가 너무 고생만 시킨 것 같다’며 마음 아파했다”면서 “감독의 오른팔 왼팔이나 다름없었던 김무관, 차명석 코치를 2군감독과 잔류군 코치로 내려 보냈고, 결국엔 차 코치가 팀을 떠나는 상황이 발생하자 누구보다 큰 상처를 받았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LG 선수들은 단체로 삭발을 하며 부진 탈출을 다짐하기도 했다. 김 감독은 이 모습에 큰 충격을 받았다는 후문이다. 사진제공=LG 트윈스
# LG로 돌아올 확률은?
프로스포츠 감독 자리는 흔히 ‘독이 든 성배’라고 불린다. 그중에서도 LG의 사령탑 교체는 유독 잦았고, 그 사연도 다양했다. LG는 지난 10년 동안 총 6명의 지도자들이 사령탑에 올랐다가 성적 부진으로 줄줄이 낙마했다.
2003시즌 다시 지휘봉을 잡은 이광환 감독과 2004시즌을 앞두고 부임한 이순철 감독은 모두 계약 기간을 채우지 못하고 유니폼을 벗거나 시즌 도중 사퇴로 LG와의 인연을 마무리했다. 양승호 감독대행 체제로 2006시즌을 마감한 뒤로 김재박 감독이 바통을 이어받았지만, 3년 동안 좋지 않은 성적표를 남기고 물러난 후 당시 2군 감독이던 박종훈 감독이 5년이란 파격적인 계약 기간을 들고 사령탑에 부임했다. 그러나 그 역시 2년 만에 성적 부진을 이유로 교체됐다.
LG를 전담하는 한 야구기자는 김 감독에 대해 이런 얘기를 풀어낸다.
“김 감독 본인 스타일대로 깨끗이 물러났다. 그동안 구단에 쌓인 것도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선수단이 하나로 뭉치고 달려가는 데 감독 교체 카드가 가장 큰 효과를 발휘할 수 있을 것으로 믿었다. 어쩌면 2011년 6월, 김경문 감독이 두산 사령탑에서 자진 사퇴했던 모양새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자신의 희생으로 선수단을 살리고자 하는 의지가 강했지만, 지금 당장은 선수들이 겪는 충격이 너무 커서 김 감독의 바람이 현실로 이뤄질 수 있을지는 지켜봐야 할 것 같다.”
지난 25일 새벽 LG 트윈스의 봉중근은 자신의 페이스북에 “보고싶습니다, 감독님”이란 글과 함께 김 감독과 함께 찍은 사진을 올렸다. 이병규 손주인 이상열 오지환 등은 자신들의 헬멧과 모자에 김 감독의 등번호인 ‘91’을 적었다. 주장 이진영은 24일 대구 삼성 라이온즈전을 앞두고 선수단 대표로 취재진 앞에 서서 눈시울을 붉히며 감독을 잃은 슬픔과 안타까운 심경을 전했다. LG 선수들 모두가 김 감독의 부재에 마음 아파한다. 구단도 김 감독의 사표를 수리하지 않은 채 계속 설득해 보겠다고 한다. 그러나 김 감독의 지인들 대부분은 김 감독의 성격상 다시 (LG로) 돌아오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잘라 말한다.
김 감독의 심경을 듣고자 여러 차례 전화를 걸었지만, 김 감독의 휴대폰은 계속 꺼져있는 상태였다. 야구계의 ‘상남자’로 불린 김 감독과 LG와의 인연은 이렇게 막을 내리고 있었다.
이영미 스포츠전문기자 riverofly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