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세대 농구부 정재근 감독(45)의 하소연에 고려대 농구부 이민형 감독(49)이 항변한 내용이다.
연세대 정재근 감독(왼쪽)과 고려대 이민형 감독은 대학농구에서 라이벌 관계지만 코트를 벗어나면 돈독한 선후배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2010년 1월 모교인 고려대 농구부 사령탑을 맡게 된 이민형 감독은 고려대 농구부의 오랜 폐단이었던 학부모의 개입과 지나친 유착관계를 청산하고, 원칙에 따른 팀 운영과 강도 높은 훈련을 통해 농구부를 개혁해나갔다. 스카우트에도 적극 나서 2011년 당시 연세대 진학이 유력했던 고교 최고 센터 이승현을 극적으로 영입했고, 2013년에는 최연소 성인국가대표 이종현까지 가세하면서 리빌딩에 성공했다. 결국엔 대학리그 정상은 물론 프로-아마 최강전 우승, 고려대와 연세대의 정기전에서 3연패를 달성하는 등 대학농구의 고려대 천하를 이루고 있다.
정재근 감독은 2011년 11월 석주일 오성식 우지원 등 모교 감독을 희망했던 지원자들과 각축을 벌인 끝에 공개모집전형을 통해 최종 낙점됐다. 흔들리던 연세대 농구부를 바로 잡아주길 바라는 간절함이 컸지만, 고려대의 상승세를 꺾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허재 감독의 두 아들인 허웅과 허훈을 스카우트하며 관심을 끌었고, 2013년 시즌에는 대학농구리그 개막전 패배 이후 경희대와 고려대를 잡고 11연승을 달리는 쾌거를 이루기도 했다.
모교 감독으로 부임 후 고려대에 다소 끌려가는 듯한 이미지를 풍기지만 정재근 감독은 지금보다 앞으로가 더 중요하다며 자신감을 앞세운다.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라이벌 대학의 수장들이지만, 농구 코트를 벗어난 자리에선 두 사람의 친분이 꽤 깊고 단단하다. 그래서인지 이 감독보다 후배인 정 감독을 고려대 안암골에서 만나자고 했을 때 그는 별다른 거부감(?) 없이 고려대 앞에 나타났다. 차분하고 정돈된 대답을 내놓는 이 감독에 비해 정 감독은 최강 입담을 선보이며 인터뷰 자리를 ‘찰지게’ 만들었다.
# 라이벌 감독의 ‘입 풀기’
정재근(정): 요즘 안암동은 완전 봄날이네요. 날씨도 좋고, 학생들도 예쁘고…. 농구를 잘하니까 뭐든지 다 좋아 보이는 것 같아. 신촌은 흥부네이고, 안암동은 놀부네이고.
이민형(이): 어휴, 왜 처음부터 바닥을 깔고 가는 거야. 정 감독은 현역 때 고려대를 무수히 이겼잖아. 우리 팀 김병수 코치는 대학 내내 연세대를 한 번도 못 이기고 졸업했을 정도야. 맞붙기만 하면 이겨대니 선수들이 무슨 맛으로 농구를 했겠어. 그때 생각하면 지금 우리가 이기는 건 새발의 피야.
정: 하긴 제가 대학 다니는 4년 동안 고려대한테는 전승을 거뒀어요. 제가 4학년일 때 1학년에 이상민이 2학년에는 문경은이 있었는데, 요즘 선수들 신장에 비하면 그리 크지 않은 키로 고려대를 상대로 연승 행진을 벌였다는 건 대단한 일이었죠. 이상민 문경은의 인기는 상상을 초월했어요. 선배인 제가 상민이를 조금만 험하게 다루기만 해도 학교 수업 ‘땡땡이’ 치고 훈련장에 찾아온 여학생 팬들이 소리를 질러대는 바람에 제대로 손도 못댔어요.
# 이민형 정재근에게 연세대, 고려대란?
이: 친구지 뭐. 오랜 세월을 함께한 친구입니다.
정: 이 감독이 친구라고 말하면 전 동반자라고 답하겠습니다. 워낙 오랫동안 라이벌로 군림하면서 속정이 푹 든 동반자!
이: 사실 우리가 학교 다닐 때만 해도 두 팀이 붙을 때는 굉장히 과격했어요. 사석에서 말도 안하고 서로 어울려서 술도 안 마셨죠. 감독끼리는 완전 앙숙이나 다름없었어요. 그러나 지금은 안 그래요. 오히려 다른 대학의 감독들보다 정 감독이랑 더 친하게 지내요. 서로 상대팀 버스도 얻어 타요. 만약 진짜 앙숙 관계라면 정 감독이 안암동으로 오겠어요? 고려대와 연세대 중간 정도인 종로나 시청 쪽에서 만나자고 했겠죠(웃음). 여기까지 오는 건 그만큼 스스럼이 없다는 얘기입니다.
정: 그건 이 감독 말이 맞아요. 제 기억에도 최희암, 박한 감독님들끼리는 서로 쳐다보지도 않았어요. 한 상에서 밥도 안 먹었죠. 지금은 세상이 달라졌어요. 평소 친분이 있던 선후배가 서로 모교 감독을 맡았다고 해서 안 보는 것도 이상하잖아요. 선수들도 마찬가지예요. 다들 친해요. 코트에서만 안 친하고(웃음).
# ‘연고전’ ‘고연전’ 맞대결 3연패
이: 제가 고려대 감독으로 부임 후 가장 핫한 정기전에서 세 번 연속으로 이겼습니다. 정기전은 많은 분들이 아시다시피 대학리그 정상에 오르는 것보다 더 중요한 대회입니다. 한 경기로 모든 게 끝나기 때문에 학교는 물론 선배들, 학생들, 그리고 선수들 모두가 이 경기에 집중합니다. 2011년 감독 자격으로 첫 정기전을 치르기 직전까지만 해도 상명대 단국대, 심지어 한양대한테까지 내리 지면서 선배들에게 불려간 적도 있었어요. 가장 중요한 정기전을 앞두고 큰일났다 싶었던 거죠. 그만큼 정기전은 농구뿐만 아니라 다른 종목의 감독들도 큰 부담을 안고 임합니다.
지난해 KB국민카드배 프로-아마 최강전에서 상무를 꺾고 우승한 고려대의 선수들이 이민형 감독을 헹가래 치는 모습. 오른쪽은 같은 대회에 출전한 정재근 연세대 감독이 SK와의 경기에서 심각한 표정을 짓는 모습. 사진제공=KBL
정: 정기전에 대한 스트레스는 당사자 아니면 절대 이해 못할 겁니다. 정기전은 두 차례 경험했고, 패배의 쓴잔만 연거푸 마셨습니다. 모두가 목을 빼고 기대하는 게임인데, 허무하게 지는 바람에 제 자신한테 실망했고, 미안했고, 속상했습니다. 그런데 대학농구를 보면 흐름이 있더라고요. 80~90년대 연세대가 정상을 내달리다 중앙대로 옮겨 가더니 경희대가 그 바통을 이어받았고, 지금은 고려대가 전성기를 누리고 있는데, 이제 곧 그 흐름이 바뀌지 않겠어요? 다시 연세대로 돌아와야죠(웃음).
이: 그래서 우리가 안심을 못해요. 흐름이란 게 분명 존재하기 때문에. 올해도 어김없이 정기전이 치러지는데, 전 상당히 어깨가 무겁습니다. 연세대의 전력이 만만치 않거든요.
정: 이 감독은 이렇게 말하면서 이미 이길 수 있는 방법을 다 꿰고 있을 거예요(웃음). 사실 학교 다닐 때만 해도 정기전은 전혀 걱정할 게 없었거든요. 전반에 조금만 열심히 해서 이기면 끝까지 그대로 이어지니까 준비도 많이 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요즘은 고려대는 고사하고 경희대, 한양대한테도 지는 상황이라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해요. 이 자리를 빌려 이 감독에게 한 가지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어요. 세 번 정도 드셨으면 이제는 조금 안 드셔도 되는 게 아닐는지. 혼자만 살면 어쩝니까. 우리 같이 살아야 하는 거 아닌가요?
# 선수 이민형과 정재근은?
이: 정 감독이 외모는 ‘저승사자’였는데 농구는 지저분하게 안했어요. 지저분한 건 오히려 제 담당이었지.
정: 하지만 저도 먹고 살려면 항상 깨끗한 플레이만 할 순 없었어요. 가장 기억에 남는 건 허재 감독을 막을 때였죠. SBS 시절 기아자동차와의 경기 때마다 제가 허 감독을 상대했거든요. 허 감독이 레이업 슛을 쏘려고 할 때 득달같이 쫓아가서 공에는 눈도 안주고 허 감독의 얼굴을 강 스파이크로 때린 적이 있었어요. 수비가 안 되니까 파울을 범한 거였죠. 허 감독도 후배의 도발에 엄청 흥분했지만, 그럴 때마다 전 도망가지 않고 허 감독에게 다가가서 ‘형, 미안해요. 저도 어쩔 수 없었어요’라고 사과했었죠.
이: 그때 인터넷이 발달 안 된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지금처럼 감시자들이 많았더라면 제 명에 못살고 은퇴한 사람들 많았을 거예요.
# 이 감독이 연세대를, 정 감독이 고려대를 맡는다면?
이: 하하, 상상만 해도 재미있네요. 만약 제가 연세대 감독이 된다면 고려대에서 데려가야 할 선수들이 있어요. 누구냐고요? 입 아프게 꼭 얘기해야 해요? 이승현 이종현 문성곤이지.
정: 제가 고려대로 간다면 연세대에서 최준용과 허웅, 허훈은 꼭 데려가야겠죠? 물론 다른 선수 모두 데려갈 수만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요. 그런데 형(이 감독을 지칭)! 원래 (이)승현이가 고려대로 오기로 했었잖아. 그런데 형이 빼앗아 갔다면서요?
이: 재근아, 그렇게 따지면 (최)준용이도 마찬가지 아니야? 원래 그 선수는 고려대 오기로 했었어.
정: 하긴 입학할 때까진 알 수 없는 게 스카우트죠. 고려대에서 훈련하고 선배들한테 기합까지 받은 선수가 다음날 연세대 입학식에 있을 때도 있었으니까요.
이: 맞아. 대학 감독들은 스카우트와 관련해서 서로 얘기 안하잖아. 서로 뺏고 빼앗기는 게 다반사이니까.
정: 그래서 대학농구는 스카우트가 80% 이상을 차지한다고 하잖아요. 스카우트를 잘하는 감독이 능력이 있는 것이고요.
이민형 감독은 농구를 하는 정재근 감독의 아들 정호영 군(삼성중3)을 이미 낙점했다며 사심을 드러낸다. 정 감독은 “형이 하는 것 좀 보고”라며 농담을 던진다. 딸이 하나인 이 감독이 정 감독에게 이런 얘기를 전한다. “재근아, 어차피 연세대에선 호영이를 못 데려가잖아. 그렇다면 나한테 줘야지. 지난번에 상주까지 가서 봤는데, 아주 좋더라. 신장도 좋고.”
정 감독은 이 감독의 아들 칭찬에 기분이 좋은 듯했다.
프로팀의 러브콜이 없었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정재근 감독은 “학교에서 어느 정도 성적을 내야 생각해볼 수 있는 문제”라고 답했고, 이민형 감독은 “난 고려대에 뼈를 묻을 것이다”라는 다분히 ‘방송용 멘트’를 날렸다. 그랬더니 정 감독이 한 마디 거든다.
“형, 이 말 그대로 녹음해서 고려대 총장한테 보낼 거야!”
이영미 스포츠전문기자 riverofly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