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최고위급 3인방의 방한은 한 마디로 ‘역대급 깜짝쇼’였다. 그들의 전혀 예상치 못한 방한에 남한이 술렁이고 있다. 일단 대화의 물꼬를 텄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하지만 박근혜 정부 입장에선 당장 ‘시의적절한 피드백’이라는, 풀기 어려운 숙제가 떨어진 셈이다. 마치 진귀한 식재료로 통하는 최고급 참복 한 마리가 덜렁 던져졌지만, 이를 어찌해야 할지 고민하는 요리사의 형국이다. 맹독을 품고 있는 참복 손질에는 세심하면서도 과감한 장인의 기술이 필요한 법. 일단 김정은이 내민 카드의 이면을 면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인천아시안게임 폐막식에 참석하기 위해 온 북한 김양건 통일전선부장, 황병서 조선인민군 총정치국장, 최룡해 조선노동당 비서가 지난 4일 인천시 남동구 영빈관에서 김관진 청와대 안보실장 등 우리 측 관계자들과 오찬을 했다. 사진공동취재단
지난 10월 4일 인천아시안게임 폐막식을 앞두고 북한의 살아있는 실세로 통하는 최고위급 인사 3인방이 깜짝 방한했다. 황병서 조선인민군 총정치국장, 최룡해 조선노동당 비서, 김양건 통일전선부장(겸 당 비서)가 그 주인공이다.
이날 3인방은 김관진 청와대 안보실장, 류길재 통일부 장관 등과 오찬을 함께했으며, 폐막식 관람 전후 정홍원 국무총리와 두 차례 면담했다. 양측 고위급 인사 간 접촉은 시종 화기애애한 분위기서 지속됐으며 무엇보다 이달 말과 내달 사이 ‘2차 고위급 회담’을 열기로 합의했다. 비록 박근혜 대통령과의 면담은 불발됐지만, 현직 총리가 북측 고위급 인사와 면담을 한 것은 2007년 노무현 정부 시절 이후 7년 만의 일이다.
북한의 이번 최고위급 3인방의 방한을 두고 벌써부터 여러 가지 해석이 줄을 잇고 있다. 일단 오랜 기간 경색국면이 이어지고 있는 남북관계가 해빙무드로 전환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중론이다.
무엇보다 이번 방한단의 면면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황병서 총정치국장은 명실상부 북한 군부의 최고위급 인사다. 정통 군 출신인 황 국장은 특히 김정은 시대에 들어 초고속 승진(올해에만 ‘상장→대장→차수’로 2계급 승진)을 거듭하며 올해 4월 좌천된 최룡해 비서에 이어 총정치국장 자리에 올랐다.
최룡해 비서는 한마디로 ‘김정은 시대의 상징’과 같은 존재다. 최 비서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죽기 전, 유서집행인으로 지목될 만큼 두터운 신뢰를 구축한 인사다. 아버지 최헌은 김일성 주석의 항일투쟁시기 전우다. 최 비서는 김정은 시대 들어, 정통 당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군 최고위인 총정치국장 자리에 오르며 실세로서의 위용을 과시했다. 비록 올해 4월 군 조직 내부의 잡음 탓에 지휘봉을 앞서의 황 국장에게 넘기며 당으로 복귀했지만, 여전히 당에서는 실세로 통한다.
앞서의 두 실세와 견준다면 비교적 무게감은 떨어지지만, 김양건 통일전선부장은 북한 최고의 대남전략통이다. 오랜 기간 당 국제부에서 몸담아온 김 부장은 2007년부터 통일전선부를 맡으며 사실상 대남관계에 있어서 북한의 얼굴과 같은 역할을 수행해왔다.
더 놀라운 것은 그 조합이다. 대남담당 비서인 김양건 부장의 방한은 둘째 치고, 북한의 핵심 권부인 군과 당의 최고위급 인사가 한데 묶여 방한했다는 것. 이는 사실상 북한이 꾸릴 수 있는 최고 권위의 사절단이다. 단순한 스포츠외교 사절단이라 볼 수 없다. 정계와 외교가는 물론 북한 전문가들 역시 김정은이 전달하고픈 분명한 메시지가 숨겨져 있으며 어디까지나 전략적 행보로 여기고 있다.
무엇보다 주목할 부분은 북한과 미국, 중국을 둘러싼 그간의 역학 관계다. <일요신문>은 지난해부터 최근까지 북한이 지속적으로 미국과의 독자적인 ‘워싱턴 라인’을 구축하고자 공식·비공식적으로 접촉했다는 정보를 접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국내 외교라인에선 암암리에 북-미관계에 있어서 ‘봉남(封南·남한 봉쇄)’에 대한 염려가 지속적으로 제기되기도 했다.
인천아시안게임 폐막식에 참석한 북측 인사들. 박은숙 기자
오랜 기간 스위스에 머물며 김정일의 ‘금고지기’ 역할을 꾀했던 북한 외교라인의 실세 리수용 북한 외무상의 최근 방미 역시 그 연장선에서 볼 수 있다. 하지만 북한의 노력과 무관하게 워싱턴은 꿈쩍하지 않았고, 최근까지 별다른 성과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이 외교가의 관측이다.
이에 앞서 북한이 미국에 접근할 수밖에 없는 원인을 제공한 쪽은 사실 중국이다. 중국의 시진핑 정부 들어 북-중 관계는 ‘냉정냉경(冷政冷經·정치와 경제관계 모두 냉각)’ 국면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무엇보다 시진핑 주석은 사실상 ‘무반응’으로 대응해왔던 기존 중국 정권과 달리 북핵에 대해 절대적 반감을 드러냈다. 지난해 중국을 방문해 시진핑 주석과 독대한 최룡해 비서 역시 당시 북핵 인정을 넌지시 요구했지만, 시진핑 주석은 이를 단칼에 거절했다는 후문이다. 무엇보다 지난해 연말 발생한 ‘북-중 라인’의 핵 장성택의 숙청은 결정적이었다.
북한 외교의 큰 축인 ‘워싱턴 라인’과 ‘베이징 라인’ 모두 여의치 않은 상황 속에서 결국 ‘서울 라인’에 선을 댈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이윤걸 북한전략정보서비스센터 대표는 이렇게 지적했다.
“중국은 이미 갈 데까지 갔고, 미국 역시 별 다른 소득이 없었다. 하지만 남한은 최소한 북을 지원할 수 있는 절반의 세력(야당을 지칭)이 존재한다. 또 최근 김태호 새누리당 최고위원이 5·24 조치 해제를 공론화한 것처럼 여권 내부에서도 우호적인 조짐이 일고 있다. 아마도 북한은 이러한 남한의 내부 사정에 대해 테스트 해보고 싶어 하는 의도가 있었을 것이고, 더 나아가 궁극적인 목적인 경제적 지원을 포함해 관계개선 신호를 보내는 것이다.”
이를 달리 보자면, 그간 ‘원칙’을 토대로 ‘관계의 정상화’를 주장해온 박근혜 정부의 대북전략이 어느 정도 먹혀든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지금부터다.
이윤걸 대표는 “어떻게 보면 북한 최고위 실세들의 이번 방한은 ‘선전포고’의 성격이 강하다. 급격한 유화적 제스처는 결국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강경모드로 돌입하겠다’는 이면을 깔고 있다. 하나의 명분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점”이라며 “앞으로 우리 정부의 대응이 중요하다. 현재로선 남한이 유리한 것이 확실하지만 우리의 대응 방식에 따라 결과는 전혀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또 다른 대북 소식통은 “북한이 이번에 초호화 방한단을 보냈다고 기존의 실리와 북핵이라는 투 트랙 전략을 포기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며 “남한 입장에선 그간 강온 전략을 번갈아 구사해온 북한 당국의 다음 포석을 경계해야 한다. 경제 조치 해제와 같이 큰 것보다 이산가족 문제 같은 작은 것부터 던질 필요가 있다”고 주문했다.
한병관 기자 wlimodu@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