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돌 9단(왼쪽)과 구리 9단이 대국 후 복기를 하고 있다.
1년여 전 10번기 얘기가 나왔을 때 팬들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절대지존을 가리는 건곤일척의 진검승부, 전부 아니면 전무의 승부, 둘 중 한 사람은 사라져야 하는 벼랑 끝 승부, 10번기는 그런 불멸의 추억을 담고 있는 말이었으니까. 그러나 개막이 차일피일 미루어졌고, 그러는 동안 이세돌과 구리를 추월할 것처럼 보이는 신진들이 속출했다. “하늘에 태양이 둘일 수 없다”는 것이 10번기의 핵심인데, 정상에 있던 이세돌과 구리가 나란히 밀려나기 시작하면서 열기도 좀 식어갔던 것.
그래도 마침내 막이 오르자 세계의 시선은 10번기에 꽂혔다. 10억 원이란 게 작은 돈은 아니니까. 게다가 이세돌, 구리가 최정상에서는 내려왔고 각자 자국 내에서도 1등자리를 후배들에게 내주긴 했어도 승부사의 캐릭터로서 아직은 두 사람처럼 매력적인 인물은 찾기 어려우니 흥행의 카드로서 그만한 조합은 없었으니까. 치열하고 날카로우며 기상천외에 예측불허인 이세돌. 대범하고 의젓하며 대국적 안목에 호쾌한 스케일의 구리. 또 두 사람 사이의 통산 전적도 막상막하였다.
1, 2국을 이세돌이 연승하자 6 대 4, 5 대 5의 점괘가 흔들렸다. 역시 큰 승부에서는 이세돌이 한 수 위인가? 3, 4국에 구리가 반격해 원점으로 돌아오자 6 대 4, 5 대 5는 다시 힘을 받았다. 그렇겠지. 일방적으로 끝날 리가 없지.
5, 6국을 이세돌이 연승했다. 흐름이 이세돌에게 기우는 것 같았다. 7국도 이세돌이 이겼다. 복기해 보면 7국이 분수령이었다. 7국은 구리가 낙승할 수 있었던 바둑이었다. 분위기가 살아났다. 사람들은 “2승, 2패, 2승…이런 식으로 반복되다가 결국 9, 10국에서 승부가 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방심하고 있던 중앙의 백 대마를 향해 노림의 명수 이세돌의 건너붙임 한 방이 표창처럼 바람을 갈랐다. 속수무책으로 대마는 갈라져 양곤마가 되었고, 대마 하나가 함몰했다. 구리는 망연자실에서 깨어나 처절하게 따라붙었으나 좁혀지지 않는 차이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충격이었을 것이다. 스코어는 5승2패. 이세돌은 필살기 한 방으로 무승부와 절반의 상금 4억 원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8국은 구리 9단 배수의 일전이었다. 구리가 7국의 후유증에서 벗어났을까. 막판이라는 부담을 떨칠 수 있을까. 이세돌이 그렇게 악착같이 둘까. 상대는 절친이고, 체면도 있고, 장소도 구리의 고향인데. 승부는 세 판 중 한 판만 이기면 되는 상황이라고 해도 또 모르는 거다. 화살 두 개 가진 사람이 화살 하나 가진 사람에게 언제나 이긴다는 법은 없는 거다. 구리가 이기면 5 대 3. 5 대 3이면 장담할 수 없는 거다. 6 대 2로 끝나면 흥행에도 별로고, 주최 측도 안 좋아하겠지? 이세돌 9단 자신도 “컨디션이 최악”이라는 말로 인사를 대신하며 충칭으로 날아갔다.
사람들의 설왕설래와 상관없이 구리 9단은 8국에서 흔들리지 않았다. 이 9단이 초장부터 능기의 ‘의표 찌르기 강수’를 연속으로 날렸음에도 국면은 중반 넘어서까지 일진일퇴, 균형이 무너지지 않았다.
중반 막바지에서 구리 9단이 승부를 걸었다. 통하는 것 같았다. 5 대 3이 되는 것 같았다. 이세돌 9단이 이겨서 끝내기를 바라는 마음, 구리 9단이 더 버텨서 10국까지 가기를 바라는 마음. 관전객들이 모순의 희망을 즐기는 사이에 이세돌의 묘수가 터졌다. 바둑판의 제1선을 기어들어가는 수. 구리 9단의 흑돌들이 잡혔고, 승부는 끝이었다. 구리 9단의 모습은 7국의 재판이었다. 망연자실했고, 그러나 돌을 거둘 수는 없어 망연자실에서 깨어나 7국에서처럼, 똑같이 처절하게 쫓아왔고. 더 쫓아갈 수 없는 지점에 이르러 2집반 거리를 남기고 분루를 삼켰다.
“구리 9단이 내상이 깊었을 것이다.” “더구나 고향 팬들 앞이었는데…” “중국이 가만히 있을까?” “혹시 10억 이상을 걸고 또 다른 10번기를 만들지 않을까?” “그럴 가능성이 높지?” “이세돌 9단은 올해 상금 수입이 13억 원 이상일 것이라는데.” “바둑사상 최고라지?”
이세돌의 바둑, 7국의 역전타였던 필살의 건너붙임 한 방, 8국의 결정타였던, 제1선을 기어들어간 두 수의 묘착, 오래 기억에 남을 것이다. 중국이 가만히 있을지, 아니면 또 어떤 카드를 또 들고 나올지 궁금하다.
이광구 객원기자
1선으로 ‘낮은포복’ 묘착 <1도>가 8국의 승부처. 구리 9단이 흑1로 젖히자 백2로 끊었다. 둘 다 강수다. 흑3으로 몰 때 백4로 여길 찔러놓고 6으로 나간다. 이건 자살수 아닌가? 그런데 흑은 7을 선수한다. 이건 또 끝내기로 손해인데…. <2도> 흑1, 3으로 백 두 점을 잡는다. 여기서 백2쪽을 끊은 것이 이 9단의 무서운 역습이었다. 흑 대마가 잡히는 건가. 흑5 찌르고 7로 끊어 잡으면 사나? 아무튼 흑도 백이 이렇게 나올 줄 알고, <1도> 흑7을 결행한 것인데… <3도> 백1이 묘착이었다. 흑2로 따내자 백3으로 파호. 흑2로 A에 두면 백B로 먹여쳐 집을 없앤다. 흑4, 6 때 백5로만 받아 놓고 7로 또다시 1선으로 들어간 것이 묘수의 연결타. 흑8, 10으로 귀살이는 했지만 백9로 흑 대마가 잡힌 것에 비할 게 못 된다. <2도> 백6으로 <4도>처럼 백1쪽을 이으면 흑2로 올라와 A, B가 맞보기. <3도> 백1이 왜 묘수인가? 보통은 <5도> 백1처럼 이쪽에서 파호하기 쉬운 장면인데, 그러면 흑은 2, 4에서 6으로 젖혀간다. 여기서 백9로 들어가는 것은 장소는 맞지만, 타이밍이 맞지 않는 것. 흑10이면 <6도> 백1로 들어오고 3으로 키워버려야 하는데, 이걸로 대마의 눈은 뺏을 수 있지만, 흑4, 6으로 죄어붙이고, 8로 잡으면 거꾸로 백 대마가 걸리는 것(백7은 흑▲에 이음). [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