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29일부터 거의 모든 차명계좌가 금지되면서 혼란이 우려되고 있다.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생각보다 많지는 않은 것 같다.”
최근 차명계좌 문제로 상담받는 고객 수에 대해 VIP를 전문으로 상대하는 시중은행 PB(개인자산관리사)는 이렇게 말했다. ‘현장’은 조용하다는 얘기다. 부촌에서 근무하는 이 PB는 “(부자들은) 이번 차명거래금지법을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거나 잘 모르는 듯하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이렇게 손 놓고 있어도 되는 것일까. 차명거래금지법 시행에 따라 29일부터 불법재산 은닉, 자금세탁행위(조세포탈 등)를 목적으로 차명 거래를 할 수 없다. 지금도 차명거래는 불법이지만 뚜렷한 처벌 규정이 없었다. 지금까지는 실소유자가 범죄 목적의 차명거래를 하다 발각돼도 차명거래 자체로는 처벌 받지 않고 약간의 세금만 추징됐다.
하지만 차명거래금지법이 시행되면 차명에 관여한 실소유자, 명의대여자뿐만 아니라 금융기관 임직원까지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50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지게 된다. 또한 ‘증여추정’ 조항이 도입된다. 불법 목적의 차명은 실소유자가 아닌 명의자 소유로 인정되는 것이다.
만약 실소유자가 계좌의 돈을 돌려받고 싶다면 재판을 통해 자신의 것임을 증명해야 한다. 즉 실소유자 스스로 금융실명제법 위반을 입증해서 5년 이하의 징역을 각오하고 돈을 돌려받는 재판을 하거나, 돈을 포기해야 한다. 때문에 만약 차명계좌가 있다면 법이 시행되는 29일 전에 자신의 계좌로 돌려놓아야 한다. 차명거래금지법 개정 이전과 이후 예치된 금융자산 모두 명의자의 소유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전국은행연합회는 차명거래금지법에 대비하기 위해 시중은행 지점에 관련 내용을 담아 <차명금융거래 Q&A> 책자를 만들어 배포했다. 이 책자에 담긴 불법 차명거래의 대표적인 사례들은 다음과 같다.
△채권자들의 강제집행을 회피하기 위해 타인 명의 계좌에 본인 소유 자금을 예금하는 행위 △불법도박자금을 은닉하기 위하여 타인 명의 계좌에 예금하는 행위 △금융소득종합과세 회피를 위해 타인 명의 계좌에 본인 소유 자금을 예금하는 행위 △생계형 저축 중 세금우대 금융상품의 가입한도 제한 회피를 위해 타인 명의 계좌에 본인 소유 자금을 분산 예금하는 행위 △비자금 세탁을 위해 타인 명의 계좌를 이용하는 행위 등이다.
증여세 납부 회피를 위해 증여세 감면 범위를 초과하여 본인 소유 자금을 가족명의 계좌에 예금하는 행위도 처벌 된다. 10년간 합산금액으로 증여세 감면 범위는 배우자 6억 원, 자녀는 성인인 경우 5000만 원, 미성년자인 경우 2000만 원, 부모는 3000만 원, 기타 친족 500만 원이다.
예외도 있기는 하다. 불법 목적이 없는 선의의 차명거래에 한해서다. 이 같은 차명거래에 들어가는 사례는 △계·부녀회·동창회 등 친목 모임 회비 관리나 문중·교회 등 임의단체의 금융자산을 관리하기 위해 대표자(회장 총무 간사 등) 명의의 계좌를 개설하거나 △부모 명의의 계좌에 미성년 자녀의 금융자산을 관리하기 위해 예금하는 경우 등이다.
금융기관 임직원의 책임도 강화된다. 금융회사에 계좌를 개설하는 고객에게는 차명거래금지법에 관한 설명을 해야 하며 설명한 내용을 이해했다는 서명을 받아야 한다. 또한 금융기관이 불법 목적의 차명거래에 가담하면 그동안의 처벌은 합계로 500만 원 미만에 그쳐 ‘솜방망이’라는 지적이 있었다. 하지만 법 시행 후에는 합계가 아닌 건당 3000만 원 이하의 과태료로 처벌이 바뀐다.
김태현 기자 toyo@ilyo.co.kr
1억 이상 고액 인출 러시 “이거야말로 지하경제 양성화” 지난 10월 27일 차명거래금지법을 대표 발의한 민병두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은 금융감독원으로부터 제출받은 10개 은행의 자료를 분석한 자료를 공개했다. 민 의원이 조사한 10대 은행은 국민, 하나, 신한, 우리, 외환, 씨티, SC, 농협, 산업, 기업은행. 전년대비 추가 인출액을 비율로 살펴보면 올해 6월부터 10월 말까지 1억 원 이상 인출액이 평균 22.5% 급증했다. 이에 차명거래금지법의 시행이 다가오자 처벌을 피하기 위해 차명으로 맡겨놨던 돈을 찾아간 것이 아니냐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민병두 의원실은 보도자료를 통해 “재벌총수들의 비자금 출처가 되었던 차명거래를 금지하는 것이야말로 지하경제양성화의 핵심과제일 뿐만 아니라 조세정의 실현을 위해 매우 중요하다고 판단해 금융실명제법 개정에 집중해왔다”고 밝혔다. 은행연합회 관계자는 “차명거래금지법에 위반될 정도라면 자산가로 볼 수 있는데 자산가들은 자신들의 돈과 관련된 리스크 이슈에 민감하다. 따라서 관련 사항을 빠르게 접하고 공부해서 잘 대응하고 있으리라 본다”고 밝혔다. [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