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히 재계의 본격적인 사업재편에는 오너경영 체제인 대기업들의 경영권이 2세에서 3, 4세로 넘어가는 시점과 맞물려 있다. 글로벌 경쟁력을 키워 성장성을 확보하려는 주력업종 전문화와 경영권 승계가 톱니바퀴처럼 굴러가는 양상이어서 재계 안팎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삼성-한화의 파격적인 거래 이후 가장 큰 관심이 쏠리는 대상은 현대차그룹이다. 완성차부문이 주력이고, 여기에 필요한 철강, 건설 등이 수직계열화를 이룬 구조이지만 산재된 부품, 건설, 물류, 시스템통합 계열사들 간 사업재편 필요성이 제기돼왔기 때문이다. 서울 삼성동 한전부지 매입에 10조 원이 넘는 ‘통큰 베팅’을 한 터라 재무적 안정성을 위해서도 주력업종 중심의 슬림화가 수반될 것이란 관측이 지배적이다.
이 과정에 정몽구 회장에게서 정의선 부회장으로 경영권 승계 구도도 수면 위로 부상하고 있다. 지난 8월 정 부회장은 그룹의 광고계열사인 이노션 지분 30%를 모건스탠리 등에 매각했다. 이노션은 정 부회장의 누나인 정성이 고문이 최대주주다.
자동차부문과 관련성이 떨어지는 광고와 함께 현대카드 등 금융부문의 계열 분리 가능성도 나오고 있다. 제너럴일렉트릭(GE)이 투자한 현대카드·캐피탈 지분을 현대차그룹이 인수할지에 시장이 주목하는 이유다. 두 회사의 합작 계약이 종료되면서 장부가격만 2조 5000억 원이 넘는 초대형 M&A다. 현대차그룹이 금융부문을 강화하는 쪽으로 선택할지, 아니면 분리해 후계구도에 시그널을 줄지가 관건이다.
현대차그룹은 지난 8월 7개 계열사를 현대위아 등 3개로 합쳤다. 지난 4월엔 현대엠코와 현대엔지니어링을 합병했다. 중복 투자에 따른 비효율성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다.
SK그룹은 올 초 SK이노베이션을 통해 2011년 인수한 미국 태양전지 제조업체 헬리오볼트를 매각, 이 부문의 사업을 접었다. 향후 반도체 사업을 중심으로 사업 구조 개편에 속도를 낼 것으로 예상된다. SK하이닉스가 분기마다 사상 최대를 경신할 정도로 주력으로 성장한 까닭에서다. 김창근 SK수펙스추구협의회 의장은 최근 CEO(최고경영자) 세미나를 통해 “현재 위기는 물론이고 장래의 위기에도 대응할 수 있도록 중장기적으로 그룹의 체질을 개편해 나가야 한다”고 강조한 바 있다.
LG그룹은 올 5월 시스템 반도체 회사인 실리콘웍스를 인수했다. 미래 먹거리로 자동차 관련 사업을 추진 중인 LG는 이 회사의 자동차용 센서 기술에 주목했다. 회사 관계자는 “지난해 4000억 원대인 매출을 2018년까지 1조 원으로 키우는 게 목표”라고 밝혔다.
포스코도 올 3월 권오준 회장 취임 직후 강도 높은 사업재편에 착수했다. 비핵심 사업부문 매각이 초점이다. 안정적 수익을 안겨준 포스코특수강을 세아그룹에 매각할 예정이다. 전남 광양의 액화천연가스(LNG)터미널 지분과 제철 부산물 판매회사인 포스화인도 처분한다. 철강을 핵심 축으로, 에너지와 소재를 신성장사업으로 육성한다는 방침에 따라 석탄발전회사 동양파워를 인수하고 리튬 직접 추출기술 상용화에 투자를 집중하고 있다.
두산그룹도 최근 두산동아를 인터넷서점 예스24에 매각하면서 마지막 남은 소비재 사업에서 손을 뗐다. 버거킹과 KFC 매각을 통해 식품사업에서도 철수했다. 최근 20년간 OB맥주를 비롯한 소비재사업을 모두 정리하고 중공업과 건설장비 전문업체로 탈바꿈했다는 측면에선 시장 상황에 대단한 적응력을 보여준 ‘변신의 귀재’다.
KT도 비주력사업 정리 차원에서 국내 1위 렌터카 운영업체인 KT렌탈의 매각을 진행 중이다.
재계 서열 9위로 올라선 한화그룹도 사업재편과 경영승계가 맞물려 돌아가고 있다. 이번 삼성 계열사 인수 과정에서 한화에너지가 인수주체로 합류한 것인데, 이 기업은 김승연 회장의 세 아들이 지분을 나눠 갖고 있는 시스템통합 업체인 한화S&C의 100% 자회사다. 한화에너지의 실적이 좋아지면 한화 S&C도 덩달아 가치가 커지는 구조가 됐다.
한화S&C는 향후 주력인 ㈜한화와의 합병 형식으로 경영승계가 이뤄질 것으로 지목된 곳이다. 삼성그룹에서 이재용 부회장 등 삼남매가 시스템통합 기업으로 출발한 삼성SDS의 지분을 확보하고, 유가증권 시장 상장을 통해 경영승계에 필요한 자금을 조성할 수 있게 된 구도와 유사한 패턴을 보이고 있다. 한화는 앞서 포장지 제조업체 폴리드리머와 24시간 편의점 씨스페이스, 제약업체인 드림파마와 소재업체인 한화L&C의 건자재 사업부문을 그룹에서 분리, 매각했다.
재계 관계자는 “1997년처럼 생존을 위한 사업재편도 있지만, 장기침체에 대응한 선제적이고 민간 자율적이라는 특징이 있다”면서 “내년에도 한계사업을 정리하는 바람이 경영권 승계 이슈와 맞물려 돌아갈 것”이라고 전망했다.
박웅채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