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일 전국검사 화상회의를 주재하는 김준규 검찰총장. 임영무 기자 namoo@ilyo.co.kr | ||
법원의 PD수첩 무죄 선고는 정치권에 ‘법조개혁’이란 화두를 던지는 등 여의도 정가에도 적잖은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하지만 여야가 지목하는 법조개혁의 타깃이 전혀 달라 국회 입법화 과정에서 진통이 예상되고 있다.
어쨌든 이번 판결로 이명박 정부 역시 큰 고민거리를 떠안게 된 건 사실이다. 검찰은 현 정부 출범 이후 정권에 부담이 될 만한 일종의 ‘골칫거리’ 사안들을 해결해 주는 역할을 해왔다. 물론 검찰이 주요 사건에 대해 사정 메스를 들이댄 것은 관련 고소장이 접수됐기 때문이었지만 검찰 기소 과정에서 형평성 논란 또한 끊이질 않았었다.
검찰이 기소한 주요 사건에 대해 법원이 잇따라 무죄 판결을 내리면서 향후 검찰의 사정 수사에 더 많은 눈과 귀가 쏠릴 것으로 보인다. 과연 PD수첩 무죄 선고 후폭풍이 검찰의 사정 드라이브에 제동을 걸 수 있을까.
검찰이 기소권을 남발하거나 자의적으로 이용한다는 비판은 현 정부 들어 유난히 많았다. 특히 기소권 남용 논란이 일었던 사건에는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들이 대부분이었다. 대표적인 사례는 인터넷 논객 ‘미네르바’ 박대성 씨나 정연주 전 KBS 사장에 대한 검찰의 기소다.
박 씨는 2008년 7월 30일 ‘외환보유고에 문제가 생겨 외환예산환전업무가 전면 중단됐다’는 글과 같은해 12월 29일 ‘정부가 긴급업무명령 1호로 달러 매수를 금지할 것을 긴급 공문 전송했다’는 글을 포털사이트 다음 ‘아고라’에 올린 혐의(전기통신기본법 위반)로 검찰에 의해 구속 기소됐다. 검찰은 “국민 불안심리를 노골적으로 자극시키고 반성의 기미가 없다”며 박 씨에게 징역 1년 6월을 구형했다. 당시 많은 네티즌들이 미네르바의 글을 정부 정책보다 더 신뢰했고, 미네르바는 현 정부 경제정책에 대해 비판적인 글을 써대며 정부를 자극했다.
하지만 지난해 4월 서울중앙지법 형사5단독(재판장 유영현)은 “제반 사정을 종합하면 박 씨가 글을 게시할 당시 허위성을 인식했다고 보기 어렵다고 보인다”며 “설사 허위성이 있다 하더라도 공익을 해할 목적이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또한 검찰은 2008년 8월 정연주 전 KBS 사장이 사장 재직 시절 국세청에 대한 세금환급소송을 포기해 KBS 측에 1900억 원에 가까운 손실을 입혔다며 정 전 사장을 배임 혐의로 기소했다. 정 전 사장은 노무현 정부 때 사장에 임명된 인사로, 현 정부 정권 출범 이후 교체 압박을 받아 왔다. KBS 이사회는 정 전 사장이 검찰에 기소되자 기다렸다는 듯이 정 전 사장을 교체하려고 했다.
법조계 주변에서는 국세청 안원구 전 국장 사건과 관련해서도 검찰이 기소권을 자의적으로 이용했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제기되고 있다. 지난해 말 검찰은 이미 미술품 강매 혐의로 구속된 안 전 국장 외에 추가로 C 건설 배 아무개 회장을 뇌물공여 혐의로 불구속 기소한 바 있다. 검찰은 2007년 초 국세청이 C 건설 세무조사에 착수하자 배 회장이 안 전 국장에게 세무조사가 잘 해결되게 해달라고 부탁하고 그 대가로 안 전 국장 부인이 운영하는 갤러리에 조형물 설치 용역을 줘 8억 6400만 원에 달하는 뇌물을 공여했다고 봤다.
▲ 이용훈 대법원장. | ||
법조계 주변에서는 이 같은 검찰의 기소가 형평성을 잃었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부장검사 출신의 한 변호사는 “대기업 임원들이 안 전 국장 사무실까지 찾아가 세무조사가 잘 끝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청탁하고 미술품을 구입하거나 미술장식품 용역을 체결했던 것은 소극적 행동이 아닌 데다 4000만 원이라는 액수도 결코 적지 않다”고 지적했다.
게다가 곽영욱 전 대한통운 사장도 한명숙 전 총리에게 5만 달러(5500만 원)를 제공한 혐의로 추가 기소됐는데, 유독 검찰은 대기업 임원들에 대해서는 기소를 하지 않았다.
당시 수사 과정에서 배 회장은 혐의를 부인했던 반면 두 임원은 비교적 수사에 잘 협조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결국 검찰의 기소권 남용이 도마 위에 오르면서 앞으로 검찰의 사정 드라이브에도 제동이 걸릴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법원의 PD수첩 무죄 선고는 정치권에도 적잖은 파장을 던지고 있다. 민주당 등 야권은 검찰의 기소권 남용 등을 문제삼아 검찰 개혁을 주창하고 있고, 여권과 보수단체들은 법원을 정면으로 겨냥하고 있는 형국이다.
야권은 검찰개혁을 위한 사법개혁특위 구성을 제안하고 있다. 민주당은 2월 임시국회에서 △대검찰청 중앙수사부 폐지 △고위공직자 비리 수사처 신설 △피의사실 공표죄 강화 △검찰의 직권남용에 대한 가중처벌 등의 제도들을 도입하겠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검찰은 최근 정보력을 총동원해 야당 주도의 사법개혁특위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반면 여권과 보수단체들은 검찰이 아닌 법원 개혁을 외치고 있다. 이들은 법관들이 지나치게 이념적인 잣대로 판결을 내리고 있다며 법원에 십자포화를 쏟아붓고 있다. 특히 노무현 정부 시절 법원 요직에 등용된 인사들이 최근 법원의 좌편향을 주도하고 있다는 논리를 펼치고 있다. 그 중에서도 법원 내 진보적 성향 판사들의 연구모임인 ‘우리법연구회’는 과거 군사정부 시절 군 사조직이었던 ‘하나회’에 비교되면서 강도 높은 비판을 받고 있다.
한나라당 정몽준 대표는 “우리법연구회가 편향된 정치적 성향을 노골적으로 표현하고 있다”며 “법관은 사회운동가가 아니다. 대중의 주목을 받으려면 법복을 벗고 시민운동을 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비판했다. 같은 당 장광근 사무총장도 “오늘 사법부의 현상은 좌파정권이 10년간 뿌려놓은 씨앗”이라고 성토하기도 했다.
한나라당은 PD수첩 선고 이전에 민주노동당 강기갑 의원의 무죄선고로 이념 편향 판결 논란이 불거지자 지난 15일 국회 사법제도개선특위 구성을 제안하는 등 일찌감치 법원개혁을 주창하고 있다. 특히 경력 15년차 미만은 형사단독 판사에 임용될 수 없도록 하는 것을 골자로 한 제도정비방안을 준비하고 있다. 이는 야권이나 진보세력에 유리한 판결을 하는 젊은 판사들을 견제하겠다는 포석으로 풀이된다.
이처럼 PD수첩 무죄 논란이 정치권으로 확전되고 있는 가운데 이번 선고로 검찰의 사정 드라이브에 제동이 걸릴지 여부도 초미의 관심사로 부상하고 있다.
한때 격앙된 반응을 보였던 검찰은 법원과 정면대응을 자제하며 장기전 모드로 전환했다. 사법개혁을 둘러싼 정치권의 공방전이 본격화될 조짐이 일고 있는 데다 앞으로도 민감한 시국사건 판결이 예정돼 있는 만큼 감정을 자제하고 이성적으로 대응하겠다는 의지를 엿볼 수 있게 한다.
대검 공안부는 관할 검찰청에 불법폭력 시위나 행위에 대해선 철저한 수사로 엄중하게 대처하라는 지침을 하달했고, 경찰은 이용훈 대법원장의 출근 차량에 계란을 투척한 사건과 대법원 앞 사법부 규탄 집회 시위자 등에 대한 수사에 착수했다.
김준규 검찰총장은 1월 21일 전국 검사가 참여하는 첫 화상회의를 주재한 자리에서 법원과의 갈등 등 현안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을 자제하면서도 “검찰은 의연하고 당당하게 나갔으면 한다”며 전열 재정비를 주문했다.
김 총장은 또 “지난주, 이번 주 복잡하지만 바르게 반듯하게 가자. 올해 기운이 검찰 쪽에 있다”며 강한 자신감을 내비치기도 했다. 법원과의 갈등 국면 와중에도 검찰 본연의 업무인 사정 작업에 만전을 기하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사법부발 유탄을 맞은 검찰이 향후 사정 드라이브를 어떤 식으로 전개해 나갈지 지켜보는 것도 법원-검찰 간 갈등의 또다른 관전 포인트로 보인다.
박혁진 기자 phj@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