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는 거야.”
지난 1일 정주영 회장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책 한 권이 나왔다. 제목은 정 회장의 명언이기도 한 <이봐, 해봤어?>다. 저자인 박정웅 메이텍 인터내셔널 대표는 1974년부터 1988년까지 전경련 국제담당 상무를 역임하며 1977년부터 1987년까지 전경련 회장으로 활동한 정 회장을 취임부터 퇴임까지 곁에서 보필했다.
# 정주영과 박정희
<이봐, 해봤어?>는 정 회장이 추진하는 사업을 곁에서 지켜보며 인상적인 사건, 에피소드들을 풀어낸다. 먼저 경부고속도로 건설시 정 회장과 박정희 대통령의 대화가 눈에 띈다. 어느날 박 대통령은 경부고속도로 공사 현장의 진행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정 회장을 청와대로 불러들인다. 박 대통령이 난공사 현황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는데 현장복 차림으로 듣고 있던 정 회장은 어느새 졸고 있었다. 박 대통령은 그런 정 회장을 깨우지 않고 조용히 바라보다가 정 회장이 1분이 채 지나기 전에 소스라치게 깨고는 당황해서 “죄송하다”고 하자 오히려 두 손을 잡으며 위로의 말을 건넸다고 한다.
훗날 정 회장은 이날의 일에 대해 인생 처음으로 엿새 동안 양말을 못 갈아 신으며 현장에서 날밤을 새우던 때 청와대에서 호출해 갔다가 난처한 일이 생겼었다고 회상했다. 정 회장도 박 대통령이 깨우지 않고 기다려 준 것에 감동한 뒤에는 이 경험을 적극적으로 응용했다. 정 회장은 “작업하다 말고 피로감에 현장에서 조는 직원을 발견하면 일부러 얼마간 자게 놔둔 뒤 딴 데를 돌아보고 와서 툭 깨운 후에 ‘오히려 내가 미안하구먼’ 하고 말하면 놀라긴 했어도 그들 역시 나처럼 감격했을 것”이라며 웃어 보이기도 했다.
# 정주영의 검소함
1998년 12월 소떼 방북 당시의 고 정주영 명예회장.
정 회장의 호적에 두 딸의 이름을 올린 ‘숨겨진 부인’ 김경희 씨도 <일요신문>에 “정 회장은 지독하게 검소했다. 워낙 검소해서 구두도 바닥에 산 날짜를 적어두고 10년을 채워야 버렸다. 옷도 재킷 안에 구매 날짜를 수를 놓아서 10년을 입고 버렸다. 어느 날은 구두가 하도 후줄근해서 제발 사라고 했더니 엄청 혼났다. 그 정도로 검소하신 분”이라고 회상했다.
# 정주영과 이병철
<이봐, 해봤어?>를 통해 여타 재벌총수들과의 관계도 엿볼 수 있다. 정 회장은 고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과 사이가 원만하지 못했다고 한다. 거친 노동자 출신으로 자수성가해 새로운 업종에 과감하게 진출한 정 회장과 일본 유학파 엘리트 출신으로 꼼꼼하고 치밀한 경영방식을 추구하는 이 회장은 판이하게 달랐다. 정 회장과 이 회장의 다른 스타일 때문인지 둘 사이는 소원했다. 따라서 지난 1986년 정 회장의 고희연에도 이 회장의 참석은 기대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갑자기 이 회장이 두세 명의 의료진 부축을 받아가면서 정 회장의 고희연에 참석했고 그 자리에서 축하 선물을 했다. 골동품에 조예가 깊던 이 회장의 선물답게 축하 선물은 재계를 이끌어온 정 회장에 대한 헌사가 쓰인 우아한 백자였다고 한다. 이 선물로 인해 두 사람 사이의 해묵은 감정의 앙금이 녹아내렸다. 정 회장 고희연이 있고 2년 뒤 이병철 회장이 타계했다. 박 대표는 두 사람의 감정적 대립이 풀어지지 않고 그대로 후세로 승계된다면 모두에게 불행한 일이 될 것을 우려해 이 회장이 결단을 내린 것으로 해석했다.
# 정주영과 구자경
정 회장과 구자경 LG그룹 명예회장의 우정도 눈에 띈다. 외향적인 정 회장과 내향적인 구 회장은 성격도 달랐고 나이도 정 회장이 열 살이나 많았다. 하지만 두 사람은 친형제처럼 서로 반말 비슷한 말투를 주고받았다고 한다. 이는 지난 2001년 정 회장이 타계했을 때 구 회장의 추모사에서 애틋한 애도로 잘 드러난다.
그러나 지난 2006년 박 대표가 구 회장을 만났을 때 정 회장과의 앙금을 확인했다고 한다. 박 대표는 구 회장이 전경련 회장이 된 후에도 사무국 임원으로서 한동안 그를 보좌한 인연으로 문안을 겸해 구 회장을 찾았다고 한다. 박 대표는 정 회장을 모시며 체험담을 엮은 책이라며 구 회장에게 자신이 쓴 책을 앞에 내놓았다. 구 회장은 책장을 넘기며 옛날이야기를 꺼내는 대신 아무 말 없이 책을 받아서 탁자 옆에 놓을 뿐이었다. 어색한 시간이 지난 뒤 돌아와 구 회장을 보필하고 있던 사람에게 구 회장 심기에 대해 전화를 걸어 물어봤다. 그때 구 회장이 박 대표가 자리를 뜬 뒤 책을 탁자 위에 내던지며 한동안 분을 삭였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박 대표는 지난 1999년 IMF 사태 당시 재벌 간 빅딜의 일환으로 있었던 현대그룹과 LG그룹 사이의 반도체 사업 빅딜이 문제가 됐다고 추측한다. 당시 구본무 회장이 완강히 거부했음에도 결국 LG반도체를 현대반도체로 넘겼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LG반도체를 인수한 현대반도체는 인수대금을 치르느라 자금난에 빠졌고 곧 이어진 반도체 불황에 10조 원의 부채를 지고 침몰했다. 또한 LG는 빅딜 조건 중에 하나로 인수한 데이콤을 정상화하기 위해 돈을 쏟아 부었지만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로 고생만 하고 건진 게 없었다.
다만 지난 2010년 정주영 회장 장남 정몽구 회장이 이끄는 현대모비스와 구자경 회장 장남 구본무 회장이 이끄는 LG화학이 자동차용 배터리를 공동 연구하고 생산하는 HL그린파워를 세웠다. 또 현대아산병원이 LG가 전용 장례식장으로 이용되는 등 <이봐, 해봤어?>는 선대에서 틀어진 우정이 후대에서 복원된 것으로 보이는 여러 상징적인 일들이 있었다고 전했다.
김태현 기자 toy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