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 후 보험설계사에 도전하는 이들이 많지만 정착률은 높지 않은 실정이다. 작은 사진은 한 남성이 채용공고 게시판을 보는 모습.
경영컨설팅 회사, 벤처기업 등에 다니던 A 씨(55)는 지난해 명예퇴직을 했다. 사업을 할 만큼 모아둔 돈은 없고 돌봐야할 가족 걱정에 눈앞이 캄캄해졌다. 정부 일자리센터에도 가봤지만 A 씨를 찾는 곳은 많지 않았다. 그러던 중 지인이 “자본금도 필요 없고 사회생활 오래한 우리 같은 사람들이 하기 좋은 일”이라며 보험설계사를 권유했다. A 씨는 그 날로 보험업에 뛰어 들었다.
B 씨(60)도 종합상사, IT 기업 등에서 25년간 근무하다 50세가 되던 해 명예퇴직을 했다. 창업을 고민해 봤지만 이곳저곳에서 들려오는 실패 사례에 덜컥 겁부터 났다. 고민이 깊어갈 때쯤, 자신의 장점을 활용할 수 있는 일을 발견했다. B 씨는 “어느덧 보험대리점 설계사 9년차”라며 “다른 사람의 삶을 컨설팅 하는 일이라 생각하니 보람 있다”고 말했다.
지난 2013년 손해보험협회와 관련업계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50대 이상 남성 보험설계사가 1만 2758명으로 전년대비 13.1%, 보험대리점 설계사는 1만 5678명으로 22.8% 각각 증가해 다른 연령대보다 높은 증가율을 보였다. 베이비붐 세대의 은퇴가 본격화하며 50세 이상 보험설계사가 증가하는 추세가 확연하다. 한 보험사 관계자도 “노후 준비가 덜 돼 있고 계속 일하고 싶어 보험회사를 찾는 50대 남성들이 늘고 있다”고 전했다.
보험설계사에 도전하는 베이비붐 세대가 증가하는 이유는 ‘진입 장벽’이 낮기 때문이다. 우선 초기 자본금이나 비용이 들지 않는다. 보험사 자체 교육과 자격시험 등을 거치면 바로 활동이 가능하다. 자격시험도 100점 만점에 60점 이상이면 합격이다. 앞서의 A 씨도 “밑천이 필요 없고 조금만 공부해도 일을 시작할 수 있다는 데 끌렸다”고 전했다.
수십 년간 쌓아온 사회 경험과 인맥을 적극 활용할 수 있다는 점도 베이비붐 세대가 보험설계사를 선택하는 이유다. 앞서의 B 씨는 “보험 설계와 상담에 있어 다양한 경험과 지식이 큰 도움이 된다”면서 “설계사를 처음 시작할 때 함께 일하던 회사 동료나 후배 덕을 많이 보기도 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진입 장벽이 낮다는 점이나 자신이 쌓아온 사회적 기반만 믿고 쉽게 보험설계사에 도전했다가는 낭패를 볼 수 있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한국은 전체 가구의 97.5%, 국민의 약 93.8%가 1개 이상의 보험에 가입한 보험 대국이다. 2014년 기준 1인당 생명보험, 손해보험을 포함해 총 3.59개의 보험에 가입했다. A 씨는 “경기 불황까지 겹쳐 신규 가입은커녕 가지고 있던 보험도 해지하는 추세”라고 전했다.
베이비붐 세대 보험설계사에게 계약 유지율과 매달 달성해야 할 고정 실적에 대한 압박은 더 크다. 계약 유지율의 경우 장점으로 믿었던 사회적 기반이 ‘양날의 검’으로 돌아오기도 한다. B 씨는 “처음 인맥을 활용해 보험에 가입했던 사람들이 가장 먼저 해지했다”며 “필요한 보험이 아닌데도 내 부탁에 어쩔 수 없이 가입해 줬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매달 달성해야하는 고정 실적은 계약 유지율을 지키는 것보다 부담이 크다. A 씨는 “새로운 시장 개척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며 “과거 지위와 입장이 떠올라 문 앞까지 가서 망설인 일도 한두 번이 아니다”고 고백했다.
지인 이상의 고객을 확보하지 못한 경우 경제적 문제에 직면하기도 하고, 회사의 압박에 못 이겨 퇴사하거나 회사의 관리를 받는 ‘보험 모집인’으로 전환된다. 개인사업자인 보험대리점 설계사에서 회사 소속의 보험 모집인으로 전환되면 실적, 유지율 부담이 완화되지만 수입은 절반 이상 준다.
영업 성적은 개인의 노력에 따라 천차만별일 수 있다. 연봉 5억 원에 ‘보험왕’을 놓치지 않는 설계사도 있다. 하지만 보험설계사 전체를 놓고 보면 이러한 성공 사례는 드물다. 1년도 채 버티지 못하고 자의적, 타의적으로 그만두는 보험설계사들이 더 많다. 금융소비자연맹에 따르면 지난해 보험설계사 정착률은 생명보험 35.7%, 손해보험 43.7%로 집계됐다. A 씨는 “처음 17명이 함께 시작했는데 3년이 지난 지금 나를 포함해 둘밖에 남지 않았다”고 털어놨다.
보험설계사들은 중간에 그만두면 최소 1개월부터 최대 11개월분 수수료를 받지 못한다. ‘본 계약자가 나가면 계약 유지가 어려워 수수료를 줄 수 없다’는 게 대부분 보험사의 방침이다. 반면 보험사는 보험설계사의 잦은 이탈에도 손해를 보지 않는다. 한 설계사가 그만두면 그가 가진 계약은 다른 설계사에게 이전하고, 해약되더라도 해약 이익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보험사는 되레 실적이 낮은 기존 보험설계사들보다 신입 설계사들을 반기기도 한다. A 씨는 “신입 설계사들은 지인, 친인척 계약 등으로 기존 설계사들보다 계약을 많이 체결해온다”며 “기존 설계사가 신입 설계사를 데려오면 높은 인센티브를 주는 이유는 그 때문”이라고 귀띔했다.
보험설계사들의 낮은 정착률은 소비자들의 피해로 돌아갈 수 있다. 보험설계사들이 중간에 그만두면 담당자가 자주 바뀌는 탓에 제대로 된 관리를 받을 수 없다. 심한 경우엔 담당자가 없어 보험료 미납으로 실효되거나 보험금 지급을 받을 수 없는 ‘고아 계약’이 될 수도 있다. 금융감독원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11월 말 보험금 관련 민원은 3417건으로 전년대비 36.1% 증가했다. 보험판매와 관련된 민원은 9.4% 상승, 소비자보호, 계약관리 부문도 각각 1.3%, 0.6% 증가했다.
금융소비자연맹은 “보험설계사의 낮은 정착률과 보험 관련 민원 증가는 밀접한 연관이 있다”며 “근본적인 개선대책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보험설계사에 도전하는 베이비붐 세대에 대해 금융소비자연맹 조연행 상임대표는 “과거를 잊고 철저히 영업맨이 되겠다는 마음가짐이 없다면 실패하기 십상”이라고 조언했다.
이성로 기자 roilee@ilyo.co.kr
문상현 인턴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