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생활 공개를 꺼려하던 박근혜 대표가 최근 잇따라 기자와 당직자들을 삼성동 자택으로 초대하고 있다. 사진은 지난 2002년 1월 자택을 공개한 모습. | ||
그런 박대표가 최근 당직자를 초대한 데 이어 22일 한나라당 취재진에게 잇따라 빗장을 풀었다.
집 안팎은 사람들의 손때가 타지 않은 듯 세월을 그대로 담고 있다. 이집에서 혼자 10여 년 살아온 박 대표의 흔적인 듯 싶었다. 집안은 특별한 장식도, 애써 가꾼 흔적도 없이 수수하고 소박한 느낌이지만 집은 집주인을 닮는다고 했던가. 단아한 정취가 묻어났다.
박 대표는 아버지인 박정희 전 대통령이 세상을 떠난 뒤 청와대를 나와 성북동에 살다가 지난 1990년 이집으로 이사왔다. 대지 1백20평, 건평 50여 평 규모의 2층 단독주택의 집값은 10억원이 조금 넘는다고 한다.
1백20개 모과 박 대표 집에 들어서려면 우선 대문 옆 경비실의 확인 절차를 거친다. 경비실에는 경비원 2명이 교대로 근무하고 있으며 방범시스템도 갖춰져 있다. 대문을 지나 돌계단을 잠시 오르면 잔디가 깔린 정원이 나오고 모과나무, 감나무, 향나무 등 잘 손질된 정원수가 눈에 들어온다.
박 대표는 탐스럽게 열린 모과를 보면서 “올해 모과가 1백20개 열렸는데 나를 제외한 한나라당 의원님 숫자와 같다”고 소개했다.
1층 거실 1층은 응접실, 주방, 손님맞이방, 드레스실, 화장실 등으로 구성돼 있다. 어쩌다 찾아오는 손님이나 친척 등 집안 식구를 맞이하는 곳이다. 거실 중앙에 연노란색 계통의 소파가 놓여 있지만 썰렁하다 싶을 정도로 가재도구가 없다.
다만 박 대표의 `추억’이 담긴 사진이나 그림들이 곳곳에 놓여 있다. 박 전 대통령과 박 대표가 함께 서 있는 모습을 그린 유화, 박 전 대통령이 직접 그린 동해안 풍경 그림 등이 벽면을 장식하고 있다.
박 대표가 직접 수를 놓은 30×40cm 크기의 파스텔 계열의 자수그림도 한쪽 벽에 걸려 있다. 박 대표는 “자수라는 게 참 어렵다”면서 각별한 애정을 표시했다. 90년대 초 힘들 때 마음을 다잡는 소일거리로 수를 놓았다고 한다.
오래된 벽난로 위에는 박 대표의 `과거’와 `현재’, ‘미래’의 모습이 자리하고 있다. 박 전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의 사진, 한복을 곱게 차려 입은 박 대표의 젊은 시절 사진 등이 놓여 있다. 이곳에 최근 동생 지만씨와 결혼할 서향희 변호사, 그 가족들과 함께 찍은 사진 2개가 추가됐다.
지난 8월 한나라당 창당 이후 처음으로 호남에서 당 연찬회를 개최했던 전남 구례 봉조리 주민들이 기념선물로 보내온 수석이 눈에 띄었다. 다른 사람에게 인사하는 듯 윗부분이 구부러져 있는 검은색 수석에 대해, 박 대표는 “볼 때마다 인사하면서 정치하라는 뜻인 것 같아 좋다”고 말했다.
또 한쪽에는 에밀레종을 축소한 작은 종이 있는데, 박 대표는 “종소리가 꼭 `엄마’하는 것 같다”고 했다. 22세 되던 해 잃은 어머니 육영수 여사를 그리워 하는 마음이 담뿍 묻어나는 듯 보였다.
드레스룸과 화장실 2층으로 향하는 계단 옆으로 박 대표만의 작은 공간인 드레스룸이 있다. 아이보리색 옷장과 화장대가 놓여 있는 드레스룸은 아늑하고 포근한 느낌을 주었다. 패션 감각이 좋다는 평을 듣는 박 대표이지만 생각보다 옷장은 크지 않았고 눈에 띄는 화장품도 없어 보였다. 화장대 위에는 작은 라디오, 손거울, 시계 등이 놓여 있다.
박 대표는 조그마한 주방을 소개하면서 “아침을 거의 안먹지만 먹을 땐 현미 후레이크를 먹는다”며 식탁위에 놓인 후레이크를 설명했다. 1층 화장실에 남자용 소변기와 여자용 좌식변기가 함께 설치돼 있는 것이 일반 여염집과 달랐다.
손님맞이방 이 방에는 육영수 여사가 손수 수를 놓아 만든 한반도 자수그림이 걸려 있다. 무궁화 꽃과 잎새로 한반도 모양을 만든 것인데, 거실에 있는 박 대표의 작품보다 조금 더 커 보였다. 2개의 꽃그림도 자수와 함께 방의 운치를 더했다.
박 대표는 저녁 식사로 퓨전 한식상을 내놓았다. 샐러드와 버섯전, 묵은 김치, 나물에 중국식 새우요리, 미더덕 무침, 현미밥, 감자국 등이 나왔고, 담백한 맛이 일품이었다. 박 대표 집에는 식사와 청소를 도와주는 파출부가 출퇴근하지만 이날은 외부에 음식준비를 요청한 듯 여러 사람들이 바쁘게 움직였다.
박 대표는 기자들에게 계영배(戒盈杯: 잔의 70% 이상 술을 채우면 모두 밑으로 흘러내리는 잔으로 과음과 인간의 끝없는 욕심을 경계해야 한다는 의미)에 백세주를 따라 주었다. 분위기가 무르익어 가면서 폭탄주가 몇 순배 돌았으나 박 대표는 입에 대지 않았다. 식사 끝자락에 박 대표가 좋아하는 복분자술도 나왔다.
2층 서재와 응접실 백자와 청자, 봉황무늬 도자기 등이 놓여 있는 층계를 올라가면 박 대표의 개인공간인 2층 서재와 응접실이 나온다. 응접실에는 작은 탁자와 소파, 미니 오디오가 놓여 있다.
당 사무처 여성직원들이 선물했다는 곰인형도 눈에 들어왔다. 오디오 주변에는 이승철, 장나라, 이효리 등의 CD 대여섯 장이 놓여 있어 박 대표가 최신가요도 즐겨 듣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박 대표의 애창곡은 솔리드의 `천생연분’이며, 가수 이승철의 열렬한 팬이다.
서재 책상위에는 박 대표가 밤늦은 시간에 자신의 홈페이지와 `싸이월드’의 미니 홈페이지에 글을 올리거나 네티즌과 대화하는데 이용하는 최신형 컴퓨터(삼성)가 있다. 박 대표는 귀가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컴퓨터 확인하는 것이라고 했다.
또 <10년후의 한국>(공병호 저), <정치의 미래>(테드 할스테드 공저), 원서로 된
책장에는 <목민심서> <금강경> <채근담> 등 고전 외에 옥스퍼드 영어사전, 스페인어 사전 등 외국어 사전과 <월간조선> 등의 책들이 꽂혀 있다.
2층에는 제법 커다란 피아노가 있다. `스타인웨이 앤드 선스’라는 피아노로, 청와대에 있을 때부터 사용해 30년이 넘은 것이란다. 박 대표는 기자들의 요청을 받고 `꽃노래’라는 곡을 직접 연주했다. 박 대표는 그러나 침실은 공개하지 않았다.
한 측근은 “몇 년 전 집안 정리를 위해 왔을 때보다 지금은 생기가 많이 돈다”고 말했다. 이날 박 대표의 `집안 투어’와 만찬은 마치 잘 짜여진 프로그램에 따라 이뤄진 듯 매끄럽게 진행됐다. 박 대표가 상당한 정성을 들였다는 느낌이 전달된 자리였다.
박 대표는 지난 2002년 처음 집을 개방한 이후 탈당, 대선 실패, 복당 등 정치적으로 시련을 겪은 탓에 자택개방을 꺼려 왔다고 한다. 그런 그가 지난 7월 한나라당 당 대표로 재선출된 이후 닫았던 집 빗장을 다시 열었고, 최근 들어 자신의 공간을 `당당하게’ 공개하는 숨은 뜻이 무엇인지 주목된다.
유영욱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