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래픽=장영석 기자 zzang@ilyo.co.kr | ||
요즘엔 이런 ‘영화 스톱’ 현상이 더 심각하다. 제작 ‘발표’만 하고 막을 내리는 경우의 99%는 제작비가 확보되지 않아서라고 한다. 충무로 사람들은 영화 한 편 만들기가 지금보다 어려운 때는 없었다고들 말한다. 대체 어떤 상황인지 속사정을 들여다봤다.
“충무로가 얼어붙었다!”
영화인들마다 한숨을 푹푹 쉬며 하는 말이다. 스타 배우나 스타 감독의 이름만 내걸면 비교적 투자가 잘 되던 호시절도 이젠 지났다.
장동건과 원빈이라는 흥행성과 연기까지 검증된 스타 배우가 주연을 맡고 역시 스타 감독인 강제규가 메가폰을 잡은 <태극기 휘날리며>. 이 영화는 호화로운 캐스팅에도 제작비를 다 확보하지 못한 상태에서 촬영에 들어가야 했다. 이 정도 캐스팅이면 예전 같으면 투자자를 고르느라 고민했을 터. 그만큼 충무로에 돈이 돌지 않는다는 얘기다.
최민수와 조재현이 주연을 맡은 무협액션물 <청풍명월>도 촬영은 마쳤으나 막판에 자금이 달려 후반 작업이 지연되기도 했다. 오랜만에 스크린에 서는 ‘흥행보증수표’ 박중훈과 김선아라는 스타 배우를 확보했음에도 <황산벌> 역시 3분의 1가량의 제작비만 확보한 채 촬영 준비에 들어가야 했다고 한다.
<튜브>와 <내츄럴 시티>는 촬영은 마쳤지만 후반작업 비용 등의 문제로 개봉이 지연되기도 했다. <튜브>의 경우 가까스로 3월에 개봉 일정을 잡았지만 ‘대구지하철 사고’란 악재 때문에 개봉을 더 미뤄야 했다.
5월 개봉을 앞두고 막바지 촬영중인 봉만대 감독의 <맛있는 섹스, 그리고 사랑>. 역시 돈 문제로 골머리를 앓았지만 얼마 전 비상구를 찾았다. 밸런타인데이 때 몸에 바르는 초콜릿을 기획상품으로 출시하는 등 홍보를 겸한 전략 아이디어로 진행비를 보충해 작업을 속개한다고.
그러나 이렇게 ‘제작비 확보를 아직 다 못했다’, ‘투자가 잘 안됐다’고 공공연히 앓는 소리를 할 정도면 대개 희망적인 경우다. 정말 영화가 ‘엎어질’ 위기에 있는 제작사들은 작업이 지연되는 표면적인 이유를 결코 ‘제작비’ 때문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시나리오 수정단계, 캐스팅중, 여전히 기획중’이라는 명분이 주를 이룬다. 가능한 한 ‘어렵다’는 티를 내지 않아야 투자 협상이 성사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앞에선 연일 스타 배우를 내세워 홍보전을 펼치면서도 뒤편에서는 투자 유치가 안될까봐 노심초사하는 제작사들이 한둘이 아니다.
한국 최초의 뮤지컬 영화를 표방했던 <미스터 레이디>. 주연인 안성기를 비롯해 백재현, 소찬휘 등을 간판으로 중간제작발표회까지 성대하게 치른 때가 불과 몇 달 전. 하지만 현재 제작사인 인디컴과 연락이 제대로 안되는 상황이다. 이미 70%가량을 찍었지만 <미스터 레이디>는 언제 촬영이 속개될지 모르는 형편이라고 한다.
때론 감독이나 제작자의 ‘장고’가 ‘미완성 영화’를 만들기도 한다. 장선우 감독과 박재동 화백이 손을 잡아 화제가 됐던 <바리 공주>는 3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기획’단계다. “애니메이션 배경팀들은 거의 손들고 나갔다. 박재동 화백을 비롯한 서울대 팀들만 남아있는 걸로 들었다. 진행은 안되는데 장선우 감독이나 박재동 화백은 너무 느긋해서 밑에서 작업하는 사람들만 속이 탄다더라”는 것이 주변 사람들이 전하는 이야기.
이런 상황에서 국내 영화계의 어쩔 수 없는 판도 변화가 예상된다. 지난해 말부터 올해 초까지의 ‘대박’ 영화들을 보면 ‘코미디 장르, 탄탄한 시나리오와 철저한 기획력, 일급스타보다 신선한 마스크와 어느 정도 연기력을 갖춘 젊은 배우의 캐스팅’이 새 흥행코드로 자리잡았기 때문이다. 막대한 자금이 투입되는 블록버스터의 자리를 탄탄한 기획을 바탕으로 한 코미디물들이 대신하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올해의 한국영화는 코미디판이 될까. 어느 영화기획자는 “충무로 사정으로 보아 순수 제작비 20억원을 넘지 않는 코미디 장르가 득세하는 상황이 당분간 지속될 것이다. 하지만 모를 일 아닌가. 이러다가 액션이나 무협 등 다른 장르의 영화 혹은 블록버스터 영화가 대박이 난다면 역시 비슷한 영화들이 뒤를 잇게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는 그게 어쩔 수 없이 시류를 좇아갈 수밖에 없는 충무로 사람들의 숙명이라고 했다. 김민정 프리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