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완벽한 서울말씨를 구사하는 그녀에게서 ‘북한’ 이미지를 찾기란 쉽지 않았다. 우태윤 기자 wdosa@ilyo.co.kr | ||
“학교생활을 더 잘하지 못해 졸업하는 게 서운하다”는 그녀를 만나 남북한 대학생활과 연예계의 차이, U대회의 ‘북녀’와 일본 진출 계획 등에 대해 들어봤다.
‘북에서 온 여배우.’
98년 귀순한 지 수년이 지나도록 여전히 김혜영을 소개할 때 등장하는 수식어다. 솔직히 말하자면 ‘귀순’이라는 단어 때문에 어딘가 그녀가 촌스러운 ‘태’가 있을 것이란 선입견이 있었다. 그러나 막상 직접 대면한 김혜영은 방송을 통해 본 것보다 훨씬 단아한 미모에 야무진 인상이었다. 북한 사투리마저 섞이지 않은 완벽한 표준말을 구사하는 그녀에게서 ‘북한’ 이미지를 찾기란 쉬운 게 아니었다.
졸업의 감회를 묻자 김혜영은 “좀 더 좋은 추억을 많이 만들지 못해 아쉽다”고 했다. ‘연극영화’라는 전공학문은 같아도 공부하는 스타일이 다르고 학교 생활도 달라서 처음에는 적응이 어려웠다고. 김혜영은 북에서 평양연극영화대 배우학부를 졸업했다.
“가장 다른 건 교육과정이에요. 북한에서는 대학교라고 해도 공부할 과목을 모두 정해줬어요. 1학년은 이 과목, 2학년이 되면 저 과목, 이런 식으로요. 한국에서는 자기가 알아서 과목을 선택하잖아요. 자연스럽고, 분위기도 자유롭고 교수님과 농담도 하지만 북한에서는 그런 게 없어요. 수업시간도 딱딱하고 교수님과 농담을 나누는 건 상상도 못할 일이죠.”
대학 생활에서 빠질 수 없는 활력소인 미팅이 북한이라고 없을 리가 없다. 단체 미팅은 없지만 대신 소개팅이 곧잘 이루어진다고. 김혜영도 그 틈에 소개팅을 한두 번 했지만 워낙 ‘운명적인 만남’을 꿈꾸었던 터라 그런 자리는 거의 사양을 했단다. 한국에서도 여대생으로서 미팅 제의가 들어왔지만 나가진 않았다고.
“저보다 한참 어린 친구들이 동기지만 같이 미팅 나가자고 권해주곤 했어요. 제 얼굴 알아보는 사람이 있으니 부끄러워서 나가진 못했죠. 동기들이 재미있게 노는 걸 보니 부럽긴 했어요.”
한국에서도 동기와 선후배가 생겨 좋았지만 북한의 대학생활을 금방 잊을 리 없다. 김혜영은 대구하계유니버시아드대회(U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입국한 북한 대학생 응원단 후배들을 직접 환영하러 나가려 했지만 졸업식 날짜와 겹치는 바람에 가지 못했다고 안타까워했다. 그러고 보니 공교롭게도 개막식 때 한국의 최태웅(남자 배구)과 함께 한반도기를 쥐고 나온 북측 여기수의 이름도 ‘김혜영’(여자펜싱)이다.
졸업 후 본격적인 연예 활동을 준비중인 김혜영. 북한에서 막 물이 오를 무렵 한국에 오게 돼서 아쉬웠다는 그녀는 그러나 처음엔 한국에서 연예 활동을 할 뜻이 없었다고 한다. ‘그저 조용히 살고 싶다’는 게 소망이었다고.
그러나 귀순한 덕분에 받은 정착금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보니 살 길을 찾아 나서야 했다고 한다. ‘배운 도둑질’이라고 북한에서도 생업이었으니 한국에서도 연예인의 길을 선택하게 된 거라는 의외의 솔직한 대답.
처음에는 북한 연예계와 다른 점이 많아 적응하기 어려웠지만 “연예계로 나서길 잘한 거 같다”고 말한다. 연예인이란 이유로 더 혜택 받은 게 있고 한국에 적응하기도 훨씬 쉬웠다는 것이다.
그녀는 북한과 한국 연예계의 가장 큰 차이를 ‘돈과 명예’라고 답했다. 북한에서는 ‘월급제’였기 때문에 영화 한 편을 더 해도 수입에는 차이가 없었다고 한다. 단지 작품을 했다는 것, 주인공을 했다는 것 등에 긍지를 높이 갖는 것뿐이었다고. 그러나 한국에서는 일을 한 만큼 부와 명예가 더 쌓이게 되므로 더 장점이 있는 거 같다고 한다. 반면 경쟁이 너무 치열하다며 걱정하기도 했다.
“힘든 일도 있었죠. 음반을 내려다 사기를 당해 돈만 날린 적도 있어요. 하지만 연예계에서 어려운 점은 저만 겪는 게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런 건 모르니까 당한 거라고 저 스스로에게서 잘못을 찾아요. 그건 지난 일이고 현재가 중요하다구요.”
요즘 김혜영은 일본 진출을 눈앞에 두고 있다. 한국과 일본, 현해탄을 오가며 음반과 CF, 방송 활동을 할 계획이고 일부 스케줄은 이미 확정된 상태. 지금 당장 문제는 “음반을 일본어로 녹음해야 하므로 일본어 공부”라고 말한다.
“‘북에서 온 여배우’라는 타이틀은 평생 갈 거 같아요. 그런 이미지에서 벗어나고 싶은 생각도 있었지만 이제는 그것도 장점이라고 생각해요. 남북을 다 겪어본 경험을 살려 문화의 차이점을 연구해보고 싶고, 책도 쓰고 싶어요. 학생들을 가르치고 싶으니 2∼3년 안에는 대학원에 진학해서 더 공부할 생각도 있고요. 제가 받은 만큼 사회를 위해 도움이 될 일을 하고 싶어요.”
얌전해 뵈는 외모와는 다르게 강단 있는 포부를 지닌 김혜영. 그녀 말마따나 ‘사선을 넘는 고비도 넘겼는데 어떤 일을 한들 그보다 더 하랴’ 하는 단단한 각오가 서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수년 안에 ‘교수면서 연기자, 가수인 김혜영’을 만나게 될지도 모르겠다.
김민정 프리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