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4일 새해 첫 국무회의 직전 인사를 나누고 있는 노무현 대통령(오른쪽)과 이해찬 총리(왼쪽), 김우식 비서실장. | ||
이에 노 대통령은 지난 1월10일 인사 검증 책임을 물어 박정규 민정수석과 정찬용 인사수석에 대한 사표를 수리하는 선에서 이번 파문을 수습할 계획이다. 하지만 야당의 책임론 공격을 받고 있는 이해찬 총리나 사의를 표명했던 김우식 비서실장은 그대로 자리를 유지한 배경을 두고 의구심을 가지는 사람도 적지 않다.
먼저 이 총리의 경우 ‘분권형 총리제’의 명분을 살리고, 검증 작업은 청와대의 몫이라는 주장이 우세해 이번 인사 파문의 책임대상에서 벗어난 것이라는 지적이다.
김 실장도 청와대가 ‘정실 인사가 아니다’며 그의 ‘무죄’를 확인해줬고 앞으로도 그의 역할이 남아있기 때문에 쉽게 사표를 수리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그럼에도 이 전 부총리에 대한 실질적인 제청권을 행사한 이해찬 총리나 이 전 부총리와 ‘40년 지기’로서 도덕성 시비에 휘말리고 있는 김우식 비서실장에 대해서는 책임을 묻지 않음으로써 ‘몸통은 살리고 깃털만 죽이는 꼴이 되었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 전 부총리 인사 파문을 둘러싼 ‘몸통 보호 작전’은 과연 성공할 것인지 추적해봤다.
이기준 전 부총리 인사 파문은 노무현 대통령의 신뢰도에 큰 타격을 입혔다. 대통령이 장관 인사 문제로 대 국민 사과까지 함으로써 스타일을 구긴 것은 물론이고 청와대의 기강이 해이해진 것이 아니냐는 따가운 비난의 목소리에 직면해 있다. 실제로 참여정부가 ‘집권 3년차 증후군’에 빠져 이번 파문이 일어났다는 해석도 나오고 있다. 지난 YS정권 때는 집권 3년을 넘어서면서 청와대 기강이 해이해지고 김현철씨의 비선 라인이 득세하면서 권력 누수를 경험했다. DJ정권 때도 3년이 되어 가자 청와대와 당의 권력이 동교동계로 급격히 넘어가면서 권력의 해이가 빚어졌다.
노무현 정권도 이런 현상의 초기에 접어들어 이번 파문이 일어났다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다. 공교롭게도 노 대통령은 지난 1·4개각 때 장관의 경질 이유로 ‘한 2년쯤 일하면 아이디어도 다 써먹고, 열정도 조금 식고, 매너리즘에 빠진다’고 말해 집권 3년차 증후군을 확인시켜주는 꼴이 되기도 했다.
이번 사태는 청와대의 인사 시스템에 문제가 발생한, 사소한 실수라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이해찬 총리가 ‘책임총리제’를 명분으로 실질적으로 제청권을 행사했기 때문에 그 책임에서 완전히 벗어났다고 할 수 없다.
한나라당 정두언 의원은 이에 대해 “청와대 민정팀에서 검증 작업을 다 했다고 하더라도 그 결과를 총리에게 모두 가져와 결재를 한 뒤 대통령에게 최종 결재를 받는다. 형식상 총리 책임이 가장 크다. 만약 그것에 대한 책임이 없다면 총리의 인사 제청권이 없다는 것과 똑같은 것 아니겠는가. 아마 옛날 같으면 총리가 사의를 표명했을 정도의 심각한 사태라고 본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노 대통령은 야당에서 주장하고 있는 ‘몸통’, 이 총리에 대해서는 여전히 신뢰를 보내고 있다. 그 이유는 대체로 두 가지로 압축된다. 먼저 이번 파문의 1차적 원인은 청와대의 부실한 검증 때문이었지 이 총리의 제청권 자체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이병완 홍보수석은 이 총리의 거취를 묻는 질문에 “총리는 이 부분과 전혀 상관없다”며 “추천은 총리가 했지만, 검증은 청와대의 몫”이라고 못박았다. 실제로 청와대 인사추천회의에서 거론되는 여러 후보들에 대한 검증 작업은 청와대 민정수석실의 몫이고 그 외 다른 자료들도 청와대가 준비하며, 이 총리 및 인사추천위원들은 이를 근거로 판단한다. 하지만 총리실이 실질적인 분권형 총리제로 간다고 선언하면서 민정 라인을 대폭 보강했다면 이 전 부총리에 대한 자체 검증 작업이 미흡하지 않았느냐는 지적도 나온다.
▲ 박정규 전 민정수석(왼쪽), 정찬용 전 인사수석 | ||
이럴 정도로 이 총리에 대한 신뢰와 분권형 국정운영에 대한 강한 애착을 보이고 있었기 때문에 쉽게 이 총리를 포기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해석이다. 그래서 노 대통령은 민정·인사수석 사표수리 결정을 밝히면서 이 총리에 대해선 전혀 거론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 총리 중심의 분권형 국정운영 선상에서 청와대 수석보좌관회의 시스템 개편을 주장해 이 총리에게 더욱 힘을 실어주었다.
참여정부 들어 총리 인물난을 겪은 바 있고 이 총리 만한 적임자가 없다는 점에서 그의 퇴진은 가능성이 적었다. 하지만 김우식 비서실장에 대해서는 사표를 수리할 것이라는 예상도 적지 않았다. 그럼에도 ‘몸통’ 김 실장도 거뜬히 살아남은 셈이다. 물론 앞으로 이 전 부총리와 ‘40년 지기’로서 도덕성 시비에 다시 휘말릴 가능성도 있지만 일단은 대통령의 신임을 얻었다.
그 배경에 대해 먼저 노 대통령의 인사 스타일을 들 수 있다. 노 대통령은 책임 소재가 분명한 부분에 대해서는 엄정한 인사를 실시하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웬만한 여론의 역풍에 대해서는 절대 흔들리지 않는 인사 원칙을 가지고 있다. 지난 김혁규 총리 임명 파동 때도 주변에서 무리한 인사라며 극구 반대했지만 한동안 자신의 뜻을 절대로 굽히지 않았다.
또한 김 실장을 경질할 경우 청와대의 입장도 난처해진다. 청와대는 김 실장의 인사 개입 부분에 대해 “정실 인사가 아니다”라며 공식적으로 부인했는데 갑자기 김 실장을 해임하게 되면 그의 인사 개입을 오히려 인정하는 꼴이 되기 때문에 이를 수용하기는 쉽지 않다는 것이다.
사실 김 실장과 정찬용 인사수석은 이번 파문이 정점으로 치닫던 지난 1월8일 대통령에게 구두로 사의를 표명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문재인 비서실장 카드가 유력한 대안으로 검토되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김대중-박지원 체제를 본떠 참여정부의 남은 기간 동안 강력한 통치력을 발휘하겠다는 청와대 나름대로의 구상이 있었는데 이를 앞당기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노 대통령의 임기가 아직 많이 남아 있고 갑작스런 청와대 개편에 따른 부담 때문에 문재인 비서실장 카드는 포기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마지막으로 김우식 실장이 앞으로도 해야할 일이 많기 때문에 그에게 기회를 더 주어야 한다는 현실적 고려도 작용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특히 노 대통령은 집권 3년차를 맞아 올해를 ‘국민통합-경제회생’의 해로 정하고 계층간-노사간 화합을 이끌어내는 ‘실용주의적 화합 정책’을 취한다는 계획을 실행하려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같은 정책 설정에 지대한 역할을 한 이가 다름 아닌 김 실장으로 알려지고 있다.
김 실장은 청와대 인사들 가운데 드물게 재계와 보수언론 등에 두터운 인맥을 구축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노 대통령에게 이 같은 국면전환의 필요성을 강조했고 노 대통령도 이에 상당부분 공감해 구체적 작업을 추진중인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김 실장은 실제로 이 같은 구상을 실현하기 위해 그동안 재계 등과 물밑접촉을 해온 것으로 알려진다.
한 예로 김 실장은 지난해 12월22일 오후 2시께 본인의 요청으로 서울 롯데호텔에서 전경련 등 경제 5단체장과 40분가량 비밀리에 만나 경제현안과 ‘투명사회협약’ 도출 방안 등을 논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시민단체인 반부패국민연대가 추진하는 투명사회협약 도출 방안이 이날 만남의 핵심의제였던 것이다. 그리고 여권과 재계의 합의를 토대로 과거 불법 대선자금이나 정치자금에 연루된 정치권-재계 인사들에 대해 오는 2월 말께 일괄 사면복권을 추진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이렇듯 김 실장은 경제와 ‘국민통합’에 올인 전략을 수립하고 노 대통령 국정운영의 상당부분을 차지하고 있는데 그 주춧돌을 빼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이 전 부총리 인사 파문으로 김 실장도 도덕성에 심각한 타격을 받았기 때문에 과연 여권이 추진하고 있는 국민통합 시나리오에 적합한 인물이냐는 의구심이 증폭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 때문에 야당에서는 김 실장의 퇴진을 주장하고 있어 앞으로 그의 진로는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이해찬 총리나 김우식 실장 두 거물에 대한 책임을 묻는 것은 여러 가지 현실적 이유 때문에 그리 쉽지 않을 전망이다. 하지만 무책임한 책임자로 몰리고 있는 이 총리와 도덕성이 훼손된 ‘국민통합론자’ 김 실장을 계속 끌고 가는 노 대통령의 발걸음도 그리 가볍지만은 않을 것이다. 이는 참여정부의 인재풀이 얼마나 협소한지를 단적으로 말해주는, 불행한 사건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