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똥개>에서 정우성과 김태욱의 격투신은 한 달 동안 연습을 거쳤고, 촬영 후 배우들이 실신해 병원에 실려갔다고 한다(아래사진). | ||
지난해 12월 초 영화 <어깨동무> 촬영 현장. 얻어맞아 눈이 부은 모습으로 연기를 펼쳐야 하는 이문식은 분장팀의 준비 미비로 마냥 기다려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
한 시간여의 시간이 흐른 뒤 분장팀 없이도 촬영이 재개됐는데 그 이유는 이문식의 눈이 실제로 퉁퉁 부어 있었기 때문. “권투 글러브를 끼고 눈을 살살 때리면 된다”는 한 스태프의 농담을 듣고 이문식이 30분간 자신의 눈을 때려 붓게 만든 것이었다. 당시 상황을 묻자 이문식은 “연기가 다 그런 것 아니냐? 방법이 없었다”며 대수롭지 않다는 반응을 보였다.
영화에서 특수효과와 분장술은 영상 속에 또 다른 ‘환상’을 만들어내는 핵심 요소인 반면 때로 ‘사실성’을 떨어뜨리게 만드는 양날의 칼이 되기도 한다. 때문에 영화의 리얼리티를 높이기 위해서는 배우들의 사실적인 연기가 더욱 필요하게 마련. 이문식의 경우처럼 리얼리티를 위해 몸 던지는 배우들의 세계를 한번 들여다보자.
배우의 사실적인 연기가 필요한 가장 기본적인 장면은 바로 격투신. 와이어 액션까지 사용하는 현란한 대결에서 사실적인 ‘막싸움’으로 격투신의 주류가 바뀐 요즘에는 배우의 생생한 연기가 더욱 절실하다.
개봉을 앞둔 <말죽거리 잔혹사>의 하이라이트는 단연 이정진과 권상우의 격투신. ‘짱’보다는 ‘일반 고교생’에 중점을 둔 이 장면의 컨셉트 역시 ‘막싸움’. 짜여진 격투가 아닌 막싸움인 만큼 두 배우는 “코만 때리지 말자”는 기본 합의하에 실제 격투를 벌여야 했다. 그 결과 권상우는 온몸에 멍이 들었고 이정진은 손가락 뼈에 금이 가는 부상을 ‘훈장’으로 달아야 했다.
지난해 영화판 최고의 격투신 중 하나로 꼽히는 <똥개>의 ‘개싸움’. 막싸움을 투견판 개싸움 수준으로 ‘격상’시킨 이 장면을 위해 정우성과 김태욱은 한 달간 서로를 실제 때려가며 맹연습을 했다. 시종 격렬하게 진행된 이 장면의 촬영은 감독의 OK 사인과 동시에 두 배우가 모두 실신해 응급차에 실려가면서 마무리됐다.
▲ (위쪽부터)다모, 위대한 유산 | ||
격투와 달리 술과 담배가 등장하는 연기는 일반인들의 ‘애호품’을 활용하기 때문에 더욱 사실적이어야 한다. 냉수를 마시며 소주인 척, 얼굴만 붉게 만들어 취한 척하는 ‘척 연기’가 더 이상 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영화 <위대한 유산>에서 임창정과 김선아의 음주 장면은 실제 술을 마시며 진행된 대표적인 경우. 이 장면에서 애드리브로 깊은 인상을 남겼던 임창정이 “기억도 안 날 정도로 만취상태였다. 내 기억에 없는 대사니, 애드리브라기보다는 술주정에 가깝다”고 털어놨을 정도다. 결국 이날 촬영은 술로 ‘맞짱을 뜬’ 김선아가 뻗으면서 마무리됐다는 후문.
<동갑내기 과외하기>에서 ‘마시는 척’ 연기했던 김하늘도 새 영화 <빙우>에서는 실제 소주를 들었다. 주량이 소주 두 잔인 김하늘은 이날 한 병 가까이 소주를 마시며 취중 연기를 펼쳤다.
담배 피우는 장면은 실제 비흡연 연기자에게는 곤욕이다. 영화 <똥개>에서 골초로 출연한 엄지원은 사실 비흡연자. 하지만 담배에 익숙해지기 위해 한 달 동안 매일 한 갑 이상의 담배를 태워야 했다.
술과 관련해 가장 고통 어린 추억을 간직한 배우는 아마 영화 <후아유>의 조은지일 게다. 체질상 술을 전혀 못 마시는 조은지는 촬영을 위해 맥주 1천cc를 급히 마시며 연기에 집중했는데 결국 그날 여섯 번이나 오바이트하는 고통을 감수해야 했다.
이 경우처럼 음주가 과하면 오바이트가 뒤따르게 마련. 하지만 이런 토하는 연기 역시 만만찮은 사실성이 요구된다. 함소원은 영화 <색즉시공>에서 실제로 토하며 오바이트 연기를 해냈다.
▲ 말죽거리 잔혹사 | ||
노출과 관련된 일화도 있다. <다모>에서 하지원은 목욕 중 ‘옷 도둑’을 쫓아가는 장면에서 ‘전라 연기’를 선보인 바 있다. 그러나 문제의 벗은 장면은 사실 살색 수트를 입고 촬영한 것으로 실제 벗은 상태는 아니었다. 하지만 직전에 계곡 목욕 장면에서는 실제 맨살이었다.
촬영이 진행된 것은 지난 7월 초. 초여름이기는 하지만 새벽에 산중 계곡 물에 들어가는 것이 결코 만만한 일은 아니었다. 때문에 제작진은 계속 수트를 입고 촬영하자고 만류했으나 하지원은 리얼한 연기를 위해 맨살로 계곡물에 들어가 두 시간 동안이나 촬영에 몰두했다.
<올드 보이>의 유지태는 캐릭터의 내면적인 고통을 몸으로 표현하기 위해 몇 달간 요가 연습에 매달려야 했다. 애초 박찬욱 감독이 요구한 자세는 요가에서도 가장 어려운 자세로 허리가 좋지 않은 유지태에게는 사실 무리였다.
결국 촬영장에 놀러왔다 이를 보다 못한 송강호가 박 감독에게 부탁해 더 쉬운(?) 자세(엎드려서 다리를 서서히 머리 바로 위로 들어올리는 자세)로 바꿔 촬영이 이뤄졌다. 그렇다고 영화 속에 등장한 이 요가 장면이 ‘쉬운 자세’라고 오해는 마시라. 이 역시 전문가가 아니라면 와이어의 도움을 받더라도 결코 쉽게 흉내낼 수 있는 장면은 아니었다.
사실적인 연기를 위한 연기자들의 사전 준비도 철저한 편이다. <와일드 카드>의 양동근과 정진영 등은 ‘뻑치기 검거’ 전문인 강력반 형사들과 여러 차례 술자리를 함께하며 ‘특별과외’를 받았다.
드라마 <때려>에서 권투선수로 출연한 신민아 역시 프로 복서 김주희에게 개인 교습을 받았다. 이 과정에서 치러진 스파링 도중 신민아는 턱이 돌아가 실신을 하기도 했다.
관객점유율 50%에 육박하는 한국 영화의 ‘기적’도 아마 배우들의 몸 아끼지 않는 프로 정신 덕분에 가능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