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왼쪽 위부터 <바람의 파이터> 양동근, <효자동 이발사>, <내 여자친구를 소개합니다>. | ||
<살인의 추억> <장화, 홍련> <스캔들> <올드보이> <실미도> 등으로 이어진 일련의 흥행작들은 대부분 상업적인 성공뿐만 아니라 평단의 찬사마저도 얻어냈다. 그런 성취에 힘입어 2004년 충무로는 그 어느 해보다 도전적인 한국영화들을 포진시켜 놓았다.
◇‘흥행사’ 곽경택의 <태풍>
“내가 잘하고 좋아하는, 남자끼리 ‘맞장 뜨는’ 느낌의 영화를 해보고 싶다. <친구>와 비슷하다고? 그래, 비슷하다. 이제 뻔뻔하게 나가고 싶다.”
곽경택 감독은 자신이 올해 선보일 신작 <태풍>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친구>에서 <챔피언>과 <똥개>를 거쳐, 이제 <태풍>으로 곽 감독이 다시 ‘흥행사’로 돌아온 것이다.
<태풍>은 두 사내의 물러설 수 없는 충돌을 이야기한다. 두 사내는 각각 남과 북을 ‘대표’한다. 그러나 이데올로기적인 갈등은 아니다. 한 사내는 북에서 탈출해 남으로의 망명을 시도했지만 입국을 거부당한다. 어린 나이였던 사내는 공해상에서 해적이 된다. 복수심에 불타는 그는 ‘한반도를 쓸어버리겠다’며 핵폐기물을 태풍에 실어 남·북한으로 날리려 한다. 그에 맞서는 다른 사내는 한국의 해군장교다. 곽 감독은 “<태풍>은 ‘찐한’ 영화다. 비장미가 넘치는 가운데 캐릭터 간의 대결과 갈등이 어느 때보다 강한 영화가 될 것”이라고 말한다.
◇최고 개런티 송강호의 <효자동 이발사>
연기파 배우 송강호와 문소리가 주연을 맡은 <효자동 이발사>는 역사에 기초한 시대 풍자극이다. 이승만 대통령의 사사오입 개헌, 4·19와 5·16 같은 역사적인 사건들이 세상을 광풍처럼 휩쓸고 지나갔던 현대사의 한가운데 소시민 이발사가 서 있다. 우연히 간첩을 신고해 표창을 받은 이발사는 결국 ‘박통의 이발사’가 된다.
어리숙한 소시민의 눈에 비친 청와대와 정보부, 그리고 궁정동 안가의 모습은 너무 무섭고 너무 거대한 희·비극의 공간이다. 송강호가 4억5천만원 개런티에 러닝 개런티를 합쳐 국내 배우를 통틀어 최고 대우를 받으며 출연을 결정했던 작품이다.
◇전지현 재기작 <내 여자친구…>
스크린에 비치는 전지현의 존재는 언제나 뭇 남성들의 가슴을 설레게 만든다. <엽기적인 그녀>로 전지현을 일약 스크린 스타로 발돋움시켰던 곽재용 감독이 <내 여자친구를 소개합니다>를 통해 다시 한번 그녀를 스크린 요정으로 변화시킨다.
<내 여자친구…>는 눈물 쏙 빼는 멜로물이다. 왈가닥 파출소 여순경 ‘경진’과 그녀를 사랑하는 여고 선생님 ‘명우’의 사랑은 여자만을 생각하던 남자가 너무 일찍 죽으면서 극한 슬픔으로 치닫는다. 죽은 남자는 바람이 되어 여자에게 돌아오지만 영원히 곁에 머물 수는 없다.
곽재용 감독은 “‘죽어서도 사랑하는’ 이야기를 만들고 싶었다”며 “현실에서는 그런 사랑을 하기가 너무 어렵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내 여자친구…>는 지난해 스릴러물 <4인용 식탁>의 흥행 참패로 시무룩해졌던 전지현의 재기작이 될 것으로 주목받는 작품이다. 게다가 전지현의 대부나 다름없는 매니저 정훈탁 대표가 <엽기적인 그녀>의 ‘재현’을 꿈꾸며 먼저 곽 감독에게 제안한 작품이기도 하다. <엽기적인 그녀>와 <클래식>을 뒤섞어놓은 듯한 모양새가 될 듯하다.
◇옷 벗은 그녀 <얼굴없는 미녀>
2004년에는 육체파 미녀 스타 김혜수가 스릴러의 한복판에 선다. 김인식 감독의 영화 <얼굴없는 미녀>에서 김혜수는 몇 차례 옷을 벗고 또 몇 차례 격정적인 섹스를 한다. 그러나 옷을 벗고 섹스를 하는 그녀는 제정신이 아니다.
심리 장애를 앓아온 그녀는 정신과 의사에게 치료를 받지만 결국 그녀에게 반해버린 의사는 최면을 통해 매일 밤 그녀를 유혹해 요부로 만든다. 격정적인 섹스는 빈 껍데기일 뿐이다. 하지만 영화에는 반전이 숨어 있다.
<로드무비>로 게이 섹스를 공공연하게 연출했던 김인식 감독에게 노출 수위란 없다. 다 벗어야 한다. 이 영화에서 김혜수는 건강미보다는 퇴폐적인 면모를 더 많이 보여주게 될 것이라고 한다. 김인식 감독은 “시나리오 작업을 위해 수없이 많은 정신과 의사와 환자들을 만났다. <얼굴없는 미녀>에서는 취재 과정 속에서 느꼈던 인간 정신의 연약함이 드러날 것이다”고 설명했다.
▲ 역도산(왼쪽), 설경구 | ||
2004년에는 실존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가 봇물을 이룬다. 역도산과 최배달이 대결하면 누가 이길까? 풋내기의 상상 속에서나 가능했을 일본 프로레슬링계의 전설 역도산과 극진 가라테의 명인 최배달의 ‘빅매치’가 2004년 펼쳐진다.
마침내 설경구를 캐스팅하는 데 성공하면서 프로젝트에 활력이 돌고 있는 <역도산>은 스모 선수로 승승장구했지만 한국계 일본인에 대한 차별을 깨닫고 프로레슬러로 전향한 역도산을 주인공으로 삼고 있다.
<파이란>으로 찬사를 이끌어냈던 송해성 감독은 거대한 몸집 안에 상처받은 영혼을 지니고 있었던 역도산의 참모습에 주목하려 한다. 링의 영웅이면서 울분을 느끼면 거리의 싸움꾼으로 돌변하곤 했고, 결국 거리에서 야쿠자의 칼에 살해당했던 역도산은 두 가지 모습을 함께 지니고 있었던 인물이다.
반면 양동근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바람의 파이터>는 좀 더 거칠고 좀 더 멋진 영웅의 화려함에 주목하는 작품이다. 16세에 현해탄을 건넜던 최배달이 일본의 내로라하는 고수들을 차례로 이기는 과정이 생생하게 그려진다.
▲ 임권택 감독 | ||
이밖에도 1982년 ‘1승 15패’라는 프로야구 통산 전무후무한 경기 기록을 남겼던 투수 감사용의 이야기를 그린 <슈퍼스타 감사용>도 80년대에 대한 향수를 자아내게 만든다.
올해는 그 어느 해보다도 다양한 장르와 소재의 한국영화들이 관객들과 만날 것으로 보인다. 영화의 라인업도 그 어느 해보다도 튼실하다. 이런 다양성의 기운은 최근 수년 동안 계속돼 온 한국영화 상승세를 절정에 이르게 할 전망이다.
지형태 영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