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위부터 <로드무비>,<헤라퍼플>,<철없는 아내와 파란만장한 남편 그리고 태권소녀> | ||
“여자보다 남자의 냄새가 더 좋고, 남자 입술이 좋고, 남자 젖꼭지가 더 좋은 걸 어떡해요.”
술에 취해 절규하는 그의 대사에 관객들은 웃음을 참지 못하지만 사실은 매우 슬픈 장면이다. 오십 줄을 바라보는 노총각 동생을 결혼시키는 게 소원인 형(주현 분)이나 그를 짝사랑해온 횟집 여주인(진희경 분)에게 이 절규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가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고독이 몸부림칠 때>에 등장하는 동성애는 사실 코믹함이 상당 부분 강조돼 있다. 이를 연기하는 배우 자체도 ‘웃음 코드’를 지닌 박영규인 데다 전체적인 영화의 줄기 역시 ‘코믹’이다. 앞에서 언급한 그의 절규 역시 애절한 내용이지만 심각한 반응보다는 웃음에 맞닿아 있다. 게이바에서 만난 남자 애인에게 박영규가 보내는 절묘한 눈 깜박거림 역시 관객들에게는 포복절도할 만한 웃음으로 다가온다.
비록 코믹으로 포장돼 있기는 하나 오랜 기간 한국 영화의 ‘금기’ 가운데 하나였던 동성애가 스크린의 주요 소재로 등장한 것은 국내 영화계의 큰 변화를 시사하는 대목. 실제로 근래 들어 적잖은 영화 속에 동성애 코드가 흐르거나 가미되고 있다.
동성애가 한국 영화의 주요 소재로 떠오르면서 절로 고생하게 되는 이들은 단연 배우들이다. 일반적인 노출 연기 및 베드신에도 부담감을 갖는 배우들 입장에서 동성애 관련 성애 연기는 더욱 고된 작업이 아닐 수 없다.
본격적인 동성애 정사 장면을 선보인 첫 번째 주인공은 홍석천이다. 커밍아웃 직후 영화 <헤라퍼플>을 통해 길거리 전라 정사신을 촬영한 것. 한남동 일대에서 진행된 이 장면에서 홍석천은 상대 배우 정해룡과 함께 전라 상태에서 세 시간 동안 꼬박 카메라 앞에 서야 했다. 상당히 추운 날씨였지만 홍석천은 공사도 거부한 채 정열적인 연기를 선보였다.
당시 홍석천은 “마치 첫 경험 같아 긴장되고 떨렸지만 내가 연기하는 첫 번째 키스신이라 최선을 다했다”고 말했지만 이로 인해 한동안 마음고생을 해야 했다. 문제의 장면이 인터넷에 노출돼 마치 ‘연예인 몰카’처럼 인식되면서 각종 악성 루머에 시달렸기 때문이다.
동성애 장면으로 가장 호된 마음고생을 했던 이는 정찬이다. 영화 <로드무비>에서 황정민과 동성애 정사 장면을 여러 차례 촬영한 정찬은 이로 인해 상당한 정신적 고통을 겪었던 것 같다. 이후 대마초 흡연 사건으로 구설수에 올랐던 정찬은 “당시 영화 <로드무비> 촬영을 위해 대마초를 피웠다”고 말해 세간에 화제가 된 바 있다.
그렇다면 배우들은 어떤 마음가짐으로 동성애 장면 촬영에 임할까. <철없는 아내와 파란만장한 남편 그리고 태권소녀>(철파태)에서 조은지와 동성애 연기를 펼친 공효진은 “조은지를 남자로 생각하고 키스신을 촬영했다”고 얘기한다. 조은지 역시 “고민스러웠지만 평소 친한 공효진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털어놓았다.
<욕망>에서 양성애자로 출연했던 안내상 역시 남자배우와의 키스신이 가장 걱정이었다고. “맨 정신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을 것 같아 술을 먹고 연습해보기도 했다”고 말한다.
신인 배우들끼리 동성 키스신을 촬영한 <사마리아>의 곽지민과 한여름에게도 어려움은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들에게는 키스신보다 노출이 더 부담이었던 듯. 목욕탕에서 전라 상태로 진행된 동성 키스신을 두고 곽지민은 “평소 대중 목욕탕에도 안 가는 성격인데 많은 스태프들 앞에서 옷을 벗고 있다는 데 신경이 쓰여 촬영이 빨리 끝나기만을 바랄 뿐이었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배우들에게 동성애 키스신보다 더욱 곤혹스러운 장면은 역시 정사신이다. 여자 배우 간의 본격적인 정사 장면은 에로비디오에서는 자주 다뤄졌지만 35mm 영화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철파태>에서 공효진과 조은지가 상체를 노출한 채 자위기구를 들고 있는 모습 정도가 전부다.
반면 남자 배우 간의 정사신은 몇 차례 사실적으로 그려진 바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로드무비>. 심지어 영화 첫 장면부터 남자 배우들의 정사신이 무려 35초 동안 계속된다.
그렇다면 여기에도 ‘공사’가 등장할까. 사실 공사는 남녀 배우가 연기에 집중하다 혹시 ‘만일의 사태’가 벌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안전장치’다. 그런데 남자 배우들끼리라면 어떨까.
<로드무비>의 정찬과 황정민 역시 공사를 했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두 주연배우의 주요 부위가 노출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또 한 가지, 혹시 일어날지도 모르는 ‘대형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공사를 해야 했다는 게 제작진의 설명이다.
과거 한국 영화에서 동성애처럼 철저히 금기시된 소재는 없었다. 70년대에 김수형 감독의 <금욕>에서 ‘흔적’ 차원으로 약간 등장한 게 전부다. 이후 에로영화의 전성기였던 80년대에도 동성애는 거의 다뤄지지 못했다. 그리고 2000년대 들어서야 비로소 동성애가 한국 영화의 주요 소재로 부각되기 시작했다.
이것은 감독의 창작 의지와 배우들의 프로의식, 그리고 사회를 폭넓게 바라보는 관객들의 시선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