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도 첫 촬영날이 기억에 또렷하다. 의정부 야외세트장에서 첫날 촬영을 위해 새벽 6시에 집을 나섰다. 오랜만의 사극 출연이라 설레는 마음에 들뜬 기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여름비는 좀처럼 멈추지 않았지만, 모든 연기자들과 스태프들이 모인 자리에서 순조로운 순항을 위해 한마음으로 고사를 지내고 촬영은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 날 저녁 즈음에 ‘다른 날로 연기됐다’는 말과 함께 나의 촬영분은 취소되었다. <대장금>과의 만남은 이렇게 기다림의 허무함을 안고 다시 한번 더 나를 다잡아보는 조심스러움으로 시작됐다.
유난히 비가 많이 내렸지만, 이병훈 감독님은 날씨에 개의치 않으시고 촬영을 진행하셨고, 밤새 촬영이 이어지기도 하고…. 정은이(어린 장금 역)의 똘망똘망한 눈망울에서 뿜어져 나오는 정신력과 집중력은 어른들을 감탄하게 만들었다.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다. 장금이가 미각을 잃어 한상궁이 힘을 실어주는 중요한 장면이었다. 그 날 촬영의 마지막 신이기도 했다. 결국 새벽이 되어서야 촬영에 들어갈 수 있었지만, 모두가 지쳐있는 상태에서 영애와 함께한 그 시간은 힘들면서도 의미가 있었다.
포기하지 않고 감정에 근접할 수 있게 도와주신 이 감독님의 끈기와 인내심에 가슴 깊이 감사드리는 마음이다. 한상궁은 나 양미경이 아닌 이 감독님의 한상궁에 대한 애정으로 인해 비로소 빛을 발할 수가 있었다.
다시 한번 시청자 여러분들께도 감사함을 드리고 싶다. 대장금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보여준 시청자들 덕분에 힘든 여건 속에서도 견디어 낼 수 있는 힘이 생기기도 했다. 밤새 이어지는 촬영과 빠듯한 일정 때문에 분장을 지울 새도 없이 그 위에 수정만 하다 보니 얼굴이 두터워져 답답하기도 했고, 수면부족으로 인해 집중력이 떨어져서 힘겹기도 했다. 그렇게 의정부 세트장에서 살다시피 했던 날들. 지금 돌이켜보면 모두가 그리운 순간들이다.
단풍이 곱게 물들기 시작할 즈음에 대장금 속의 한상궁 모습이 보기 좋다는 말과 함께 내게도 좋은 일들이 많아졌다. 하지만 최상궁을 연기했던 미리의 마음고생을 생각하면 미안하기도 했다. 끝까지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열연을 한 미리에게 뜨거운 박수를 보낸다.
투명하리만치 맑은 영애는 이번 작품을 통해서 건강하고 밝은 장금의 모습과 흡사했고, 수라간 마당에서 비가 내리는 신 중간에 흠뻑 젖은 후배를 따뜻하게 챙겨주는 심성이 보기 좋았다.
모두가 자기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모습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얼마 전 민상궁이 최고상궁에 오르는 모습을 보면서 잠시 한상궁으로 되돌아가는 내 자신을 느꼈다.
한상궁의 묵묵히 일하는 모습이 좋았고, 중심이 흔들리지 않는 소신과 음식에 대한 남다르고 깊이 있는 철학을 배우고 싶었다. 그런 매력적인 인물을 연기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에 대해 얼마나 감사하는 마음인지….
네티즌의 뜨거운 사랑으로 죽음이 연장되기도 하고, 아름다운 최후를 내 고향 제주에서 맞이하며 마지막 촬영을 한 것 또한 아주 특별한 느낌으로 남아 있다.
나는 아마 대장금과 한상궁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지나온 그리운 순간들은 영원히 내 가슴 속에 남을 것이며, 내 가슴을 뜨겁게 하기에 이제 나는 다시금 열정을 꿈꾸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