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해 10월 현충원에서 있었던 박정희 대통령 25기 추모회에 참석한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 조만간 박 대표가 침묵을 깨고 박정희 대통령과 관련해 ‘중대 선언’을 할 거란 이야기가 측근을 통해 흘러나오고 있다. | ||
한일협정, 박정희 전 대통령 저격(미수) 사건 등 민감한 외교 문서 공개에 이어 광화문 현판 교체, DJ(김대중 전 대통령) 납치사건, 10·26사건을 다룬 영화 <그때 그 사람들> 개봉 등 박 전 대통령의 `3공 과거사’ 에 대한 파상공세가 강도를 더해가고 있다.
여기에 국정원, 경찰, 검찰 등 권력기관들의 자기 과거고백도 줄을 이을 것으로 보여 박 전 대통령의 딸인 박 대표를 곤혹스럽게 만들고 있다. 특히 당내 ‘반(反) 박근혜 그룹’들은 박 대표를 옹호하기는커녕 기다렸다는 듯이 여권의 공세에 힘을 보태겠다는 태세여서 박 대표 처지를 더욱 어렵게 만들고 있다.
내우외환의 곤경에 처한 박 대표는 과연 아버지 박 전 대통령을 버릴 수 있을까.
박 대표는 지난 20일 “내가 누구의 딸인지 잊어달라”며 당이 과거사 문제에 당당하게 대처할 것을 주문한 뒤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다. 정면대응이 사태를 더 악화시킬 수 있다는 판단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마냥 지켜만 볼 수 없는 입장이다. 박 전 대통령의 ‘허물’이 불거질수록 박 대표의 부담은 가중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박 대표가 제1 야당 대표로 성장하고 유력한 대선 후보로 꼽힐 수 있었던 데에는 아버지 박 전 대통령의 후광이 컸다. 또 아직까지 국민들에게는 ‘정치인 박근혜’보다는 ‘박정희의 딸 박근혜’가 더 가깝게 느껴지는 게 현실이다. 자신의 정치적 토대이자 자양분인 아버지를 버리고 홀로서는 것은 자칫 정치생명을 건 모험이 될 수도 있다.
박 대표는 지난 1998년 4월 재보궐선거에서 당선되던 날 밤 ‘새마을 찬가’를 틀어 놓고 “부강하고 튼튼한 나라를 만들고자 노력하시다가 비운에 가신 아버지의 유업을 계승하고 발전시켜야 한다는 의무감을 가진다”고 당선 소감을 밝혔다. 자신의 정치입문이 아버지가 못다 이룬 유업을 잇고, 계승하기 위한 것임을 분명히 밝힌 것이다.
5·16군사쿠데타가 일어난 지 40년이 되던 2001년 5·16에 대한 국내외 논란이 계속되자, 박 대표는 “이회창 총재가 박 전 대통령 집권기에 대한 역사관을 밝히지 않는다”고 공격했다. 또 2002년 대선 때에는 ‘국민통합21’ 정몽준 후보와의 연대 문제가 나왔으나 박 대표는 박 전 대통령을 시해한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의 변호를 맡았던 강신옥 변호사가 정 후보를 돕고 있다며 일언지하에 거절하기도 했다.
지금까지 박 대표에게 박 전 대통령은 정치의 시작이자 마지막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차기 대권을 노리는 박 대표의 고민이 깊어가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박세일 정책위의장은 최근 사석에서 “이럴 때는 ‘그러면 마누라를 버려야 하냐’고 했던 노무현 대통령을 배우고 싶다”고 고충을 토로했다.
지난 2002년 민주당 대선 후보 당내 경선 때 경쟁자였던 이인제 의원이 노 대통령 장인인 권오석씨(고인)의 좌익 활동을 문제 삼아 ‘색깔론’을 제기하자, 노 대통령은 “30년을 넘게 함께 산 조강지처를 장인 때문에 내쳐야 하느냐”며 정면 돌파한 것을 염두에 둔 말이다. 노 대통령은 이 한마디로 과거사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이 의원에게 ‘구태’이미지를 덧씌우는 1석2조의 효과를 거두었다.
박 대표 최측근인 전여옥 대변인은 “과거사 문제는 이미 예상했고, 각오했던 일”이라며 “박 대표는 평상심을 잃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다”고 말했다. 당분간은 ‘무대응’으로 일관하겠다는 뜻으로 읽힌다.
유승민 대표비서실장도 “일일이 공세에 반응하기 시작하면 결국 여권의 함정에 빠지는 수가 있다”며 “현재로선 사태추이를 지켜보면서 대범하게 대처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고 강조했다.
박 대표는 최근 영화 <그때 그 사람들>의 시사회가 열린 것에 대한 질문을 받고 “문제가 있는 것 아니겠느냐”며 속내를 간접적으로 드러낸 뒤 “보고는 받았는데 직접 보지는 않아 내용은 모르겠다”며 구체적인 언급을 피했다.
하지만 박 대표가 끝까지 ‘침묵’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박 전 대통령과 관련한 ‘중대 선언’을 하고 정면 돌파할 시기를 모색하고 있다는 측근들의 전언이 이를 뒷받침한다.
박세일 정책위의장은 “박 대표는 조사할 것은 조사하고, 드러낼 것은 드러내자는 입장”이라며 “다만 역사를 정치인들이 재단할 경우 정권이 바뀌면 다시 역사를 재평가하는 악순환이 되풀이되는 만큼 객관적이고 공정하고, 중립적인 역사학자들이 하자는 것이 박 대표의 생각”이라고 말했다. 다른 한 측근은 “박 대표는 큰 흐름을 볼 줄 아는 정치인”이라며 “지금은 때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지금 상황이 꼭 박 대표에게 나쁘게만 돌아가는 것도 아니다. 한국사회여론연구소(KSOI)가 지난달 28일 여론조사 전문기관인 ‘테일러 넬슨소프레스(TNS)에 의뢰한 여론 조사에 따르면 박 전 대통령에 대해 ‘경제성장 등 잘한 점이 더 많다’는 긍정적인 응답(81.8%)이 ‘독재, 인권탄압 등 잘못한 점이 더 많다’는 부정적인 대답(15.6%)보다 압도적으로 높았다.
하지만 ‘박정희 3공 과거사’에 대한 재평가에 대해서는 ‘역사 바로 세우기 일환으로 찬성한다’는 응답이 65.4%, ‘야당 탄압의 의도가 있으므로 반대한다’는 대답은 28.6%로 나와 박 전 대통령의 재평가는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계파 구분 없이 홀로서기를 요구하는 당 사정도 문제다. ‘반 박근혜 그룹’의 홍준표 의원은 “한나라당은 영원하지만 대표는 영원하지 않다”며 “5·6공 이미지를 갖고 있는 한나라당이 이제 3공 이미지까지 덧씌여지게 됐다”고 박 대표에게 직격탄을 날렸다.
이들 비주류들은 “대한민국 최고의 보수인물인 이회창 전 총재를 내세우고도 두 번이나 대선에서 패배한 것은 이 전 총재의 가족문제(아들병역, 빌라 등)가 한나라당의 문제로 간주됐기 때문”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과거사 족쇄를 차고 있는 박 대표 갖고는 집권할 수 없다는 ‘박근혜 불가론’으로 읽힐 수 있는 대목이다.
중도파 임태희 의원은 “노무현 정권의 실정과 국정 파탄에 기대여 감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는 ‘감나무 정당’으로 남을 것인지 결단을 내려야 한다”고 박 대표를 압박했고, 소장개혁파들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이니까 무조건 안된다는 주장도 문제이지만, 박 대표는 과거사 문제에 대해 보다 분명한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박 대표 홀로서기를 압박하고 있다.
보수파 이방호 의원 역시 “박 대표가 아버지와 분명한 선을 그어야 한다”면서 “문제는 박 대표가 어떤 말을 해도 박 대표가 당 대표라는데 한나라당의 고민이 있다”고 말했다. 박 대표가 아버지와 결연을 하든지, 대표직을 포기하든지 해야 한다는 말로 들린다. 박 대표가 아버지 박 전 대통령을 넘어서면서도 상처없이 홀로 설 수 있는 묘책을 찾아낼 수 있을지 주목된다.
유영욱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