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서양의 요부들. <팜므 파탈>의 레베카 로미진 스테이모스(위), <범죄의 재구성> 염정아(아래) | ||
이쯤에서 다른 여자를 찾아 나섰어야 했다. 카메라 앞에서 거리낌 없이 허물 벗을 여자쯤 많으니까. 하지만 그녀의 얼굴은 흡사 꿈에 그리던 청순가련형 미인의 그것이었다. 어깨 아래로 살포시 빗어 내린 긴 생머리와 도톰한 입술, 적당히 어깨를 드러내는 섹시한 노출은 천박한 자기과시와는 다른 것이었다.
안된다는 걸 알면서 ‘작업’에 돌입한다. 안다. 이런 곳에서 작업하는 건 룸살롱에서 여자 꼬시는 것만큼이나 부질없을 짓인 것을. 하지만, 뻔히 알면서도 그녀의 청순한 유혹을 부정하기가 어렵다. 혹시나 그녀도 오빠를 맘에 들어 하지 않을까.
유혹은 치명적일수록 거부할 수 없는 법. <범죄의 재구성>에서 일명 ‘구로동 샤론 스톤’ 서인숙(염정아)은 ‘불세출의 사기꾼’ 김선생(백윤식)과 ‘두 얼굴의 사나이’ 최창혁(박신양) 사이를 오가며 위험한 줄타기를 벌인다. 전대미문의 한국은행 사기인출사건의 전모는 구로동 뒷골목에 웅크리고 있는 한 ‘팜므파탈’(위험한 요부)의 사악한 마음에 달려 있는 셈이다.
잘 알려진 작품은 아니지만, 브라이언 드 팔마 감독의 <팜므 파탈>(Femme Fatale)에는 <범죄의 재구성>의 서인숙쯤은 아무것도 아닌 치명적인 여인이 등장한다. <엑스맨>에서 색기절정 변신 돌연변이 ‘미스틱’으로 출연했던 레베카 로미진 스테이모스가 악마적 매력을 지닌 여인으로 출연한다. 그녀의 목적은 돈이 아니다. 팜므파탈의 매력은 남자의 목숨을 빼앗을 만큼 치명적이다.
어쩌면 팜므파탈의 치명적인 독기는 남자의 내면 깊숙이 숨어 있던 파멸에의 열망을 이끌어내는 데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내던지고 싶은 열망은 모든 사람의 영혼 뒤에 잠들어 있는 치명적인 광기다. 팜므파탈은 그러한 광기를 폭발시키는 뇌관인 셈이다.
현실에도 팜므파탈은 존재한다. 스크린 속 팜므파탈에 비하면 덜 요염하지만 더 위험하다. 그들은 육체적 쾌락보다는 지고지순한 순정을 이용하길 좋아한다. 상대를 사랑하는 순간, 권력 관계는 시작된다. 한 쪽은 주인이고 또 한 쪽은 노예다. 그러니 세상 모든 여자를 팜므파탈로 만드는 것은 어쩌면 남자들이다. 모든 걸 내던져 매달리는 남자들 말이다.
오빠 전화번호 알려줄게. 응. 너 이쁘다. 응. 허무한 채팅료만 천정부지로 올라간다. 삐…(채팅료가 부족해 화상 채팅을 종료합니다).
지형태 영화칼럼니스트